이 사람!

[나혜석]"여성 아닌 이름 석자로 살라" 백년 전의 나혜석이 말을 걸었다 (김아현, 중앙일보)

colorprom 2019. 6. 4. 16:47



"여성 아닌 이름 석자로 살라" 백년 전의 나혜석이 말을 걸었다

“나혜석은 외도를 해서 이혼 당하고, 조선 땅을 시끄럽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제가 본 나혜석은 한국에서 최초로 배운 여자가 무엇을 하고 살 수 있는가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입니다.”

_장영은 문학연구자, 폴인( fol:n)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에서
 
[폴인을 읽다]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나를 선택했다
“공산주의 영향을 받아서 중국 여자들은 남자 무서운 줄 몰라요.”
 
어느 봄날,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가 한 말이었다. 귀를 의심했다. 이윽고 눈도 의심했다. 문제 제기하는 학생은 없었고 수업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교수의 표정도 편안했다. 한 대 맞은 듯이 얼얼한 채로 강의실을 나와서 버스를 탔다. 이어폰에서는 자우림이 부르는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내 속에 가시가 너무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다는 가사가 아팠다. 순간 튀어나온 감성에 나 자신조차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더 진심 같았다. 내 감정을 의심할 정도로 수많은 가시가 내 속에 있던 것이다. 그 강의실에서 나는 손을 들 수 없었다. 나는 여자이지만, 여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남들 하는 거 다해보고 싶은 20대이자, 교수에게 잘 보이고 싶은 학생이자, 균열을 내는 주체가 아니라 방관자가 되고 싶은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손을 들지 않았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딱 한 번만 넘기면 되는 문제였다. 별것 아닌 해프닝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가 딱했다. ‘성공’하려면 이깟 일쯤은 웃고 넘길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 딱 한 번이 문제였다. 딱 한 번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존재를 부정당하고도 넘기는 일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 될 것은 뻔했다. 그렇게 저 교수는 세월을 보내온 것이다. 그 세월에는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한 바를 내뱉지 못하는 미래가 그려졌다. 그를 위해서 이렇게 아등바등 버틸 이유는 없었다. 나는 닳고 있었다. 성적인 농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센 척하고, 애인 앞에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고, 원치 않은 외모 평가를 웃으며 넘기는 순간마다 나는 조금씩 닳아가고 있던 것이다. 닳는 것이 싫어서 나를 지키기로 했다. 그렇게 다른 세계로 진입해버렸다.  
 
나는 확신한다. ‘나답게 살아야지’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이는 없다고. 세상이 자아를 지킬 수 없도록 만들 때 인간은 선택한다. 자아를 포기할지, 세상을 바꿀지.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이는 대단한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위한 선택을 한 것뿐이라고 믿는다. 그 선택이 대단하지 않은 만큼 고통으로 점철된 삶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세상과 투쟁하기로 마음먹으면 그는 그대로 자유롭다. 적어도 내적 갈등을 이겨내고 자아는 견고한 하나로 자리하니까. 생각해보면 자우림의 가시나무를 들은 날, 나는 처음으로 해방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 나혜석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폴인]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 나혜석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폴인]

 
최초의 여자, 투쟁의 역사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_나혜석<경희>(1918) 중에서
 

새로운 시대는 왔습니다. 모-든 헌 것을 거꾸러치고 온-갖 새것을 세울 때가 왔습니다. 모든 죄, 모든 악의 사라질 때가 왔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개조하여야 될 때가 왔습니다. 그러면 무엇부터 개조하여야겠습니까? 무엇 할 것 없이 통틀어 사회를 개조하여야겠습니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가정의 주인 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_김일엽이 창간한 잡지 <신여자> 창간사 중에서
 
이 땅에서 여성들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학교, 직장, 친구·연인 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갈등은 일상적이며,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순간에는 자아를 택해서 쓴소리를 뱉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세상과의 조화를 위해 웃고 넘기기도 한다. 그런데, 전 생애를 걸어 자아를 위해 투쟁한 여성들이 있었다.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 걸출한 문인이면서 승려였던 김일엽, 사회주의 혁명가 허정숙, 최초의 여자 변호사 이태영, 코스모폴리탄 천재 화가 천경자.  
 
특히나 나혜석과 김일엽은 어떤 상황이든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거부하고 핍박할 때, 나혜석과 김일엽은 끊임없이 자신이 누군지를 고민했고, 찾았고, 기록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핍박과 고통 속에서 서로를 응원했고 지지했다. 김일엽은 차가운 세상의 시선에 상처받은 나혜석을 위로했고, 김일엽이 스님이 되어 아들을 내쳤을 때 그를 대신해 아들을 따스하게 맞아준 것은 나혜석이었다. 나 또한 페미니즘을 접한 후 크고 작은 투쟁이 삶에 들어왔음에도, 주변의 친구들이 있어 든든함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기에, 진심으로 사랑하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의 연대는 단순한 친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거울 같은 존재이기에, 서로의 고독과 고통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 걸어갈 동지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다. 
 
폴인(fol:in)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의 표지. [사진 폴인]

폴인(fol:in)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의 표지. [사진 폴인]

 
나혜석과 김일엽은 무엇인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아와 세계가 갈등할 때, 자아를 택한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선택이 그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끊임없이 되살아나, 많은 여성의 희망이 되고 있다. 장영은 문학연구자가 쓴 폴인(fol:in)의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에서는 가십과 오명으로 덮여있던 이들의 삶을 재조명한다. 식민지 조선 여성이 당대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아를 찾아가는 삶을 보여준다. 화제가 된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해설한 장영은 문학연구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의 삶 마디마디에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여자가 아닌 나로 살아가기
누구나 처음이 있다. 삶에 대한 확신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기에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최초의 삶이 있고 그를 따라간 다음이 있다면, 보다 안심하고 인생이라는 여정의 첫 발걸음을 뗄 수 있다. 처음 페미니즘을 만난 후, 불안감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내 삶이 정상 궤도에서 이탈할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여성이 아닌 자기 이름 석 자로 당당히 사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조금씩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감정과 생각을 내뱉으면서 존재하고 싶다고. 그래서 여성이 아니라 내 이름 석 자로 살고 싶다고.삶에 대한 확신은 언제 취업하고, 결혼하고,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것에 대한 계획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고자 고민하기 시작할 때 생기는 것이라 믿는다. 삶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이들이라면,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떨림을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김아현 객원에디터 folin@folin.co
 


[출처: 중앙일보] "여성 아닌 이름 석자로 살라" 백년 전의 나혜석이 말을 걸었다

99년 전 결혼한 나혜석이 내건 세 가지 결혼 조건

지식 플랫폼 폴인(fol:in)의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 2화 <나혜석: 말하는 여자가 이긴다>를 일부 공개합니다. 이 스토리북은 폴인의 웹페이지에서 15일 하루만 무료로 공개됩니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_나혜석의 소설 <경희> 中
 
나혜석(1896~1948) : 말하는 여자가 이긴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불리는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며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일간지에 소식이 실릴 정도로 떠들썩했던 결혼이었습니다. [사진 폴인]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불리는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며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일간지에 소식이 실릴 정도로 떠들썩했던 결혼이었습니다. [사진 폴인]



1.  결혼보다 공부가 하고 싶다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 출생입니다. 이른바 ‘나 부잣집 딸’이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배우 나문희의 고모 할머니죠. 지금 우리와 그렇게 멀지 않다는 뜻입니다. 감이 오시나요?  
 
나혜석의 아버지는 개명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시장이나 군수 정도. 그러니까 구한말과 식민지 시기,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관료 집안이었고, 양반 출신 지주 집안이라 수원 일대에 땅도 많았다고 해요.  집에서는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했고, 똑똑해서 서울로 유학을 보냈어요. 진명여고보 출신입니다.
 
자, 진명여고보를 보낸 나혜석의 아버지는 그 다음에 뭐라고 했을까요.  
 
“내가 정말 딸한테 해줄 수 있는 교육은 다 시켰다. 이제 시집을 가거라.”
 
나혜석은 어땠을까요? 아버지 말씀 따라 시집을 가고 싶지는 않았죠. 왜냐하면 이미 새로운 세상을 알았으니까요. 나혜석은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유학을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승낙하지 않습니다.
 
나혜석을 도와준 것은 바로, 나혜석의 친 오빠 나경석(1890~1959)입니다. 그는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 뛰어난 지식인이었어요. 도쿄 유학생 네트워크는 다 나경석의 손 위에 있다고 할만큼요. 그는 유독 나혜석을 아꼈습니다. 나혜석을 위해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합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수원의 부잣집 딸이 일본으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간다. 어떤 선입견이 있죠? 친일파? 부르주아? 그리고 공부에는 관심 없었을 거다?
 
나혜석은 진명여고보 1등 졸업이에요. 정말 남다른 학생이었고,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유학을 간 겁니다. 하고 싶은 일을 굉장히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성격이었어요.
 
1913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했는데요, 이렇게 똑똑하고 세련된 여자가 도쿄에 가서 미술 공부를 하니 어떻겠습니까? 자신 앞에 펼쳐진 신세계를 나혜석은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어요.  
 
당시 일본은 세계의 다양한 페미니즘 담론이 용광로처럼 섞여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여자들이 ‘우리 이대로 살아도 돼?’라며 여성의 권리에 대해 문제의식이 터져 나오던 때였죠. 미술 공부를 하던 나혜석은 여성 문제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때 나이가 열아홉이었는데, 이 시대의 부인, 여성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를 주제로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3호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합니다.
 
이듬해 스물이 되자, 아버지에게 연락이 옵니다.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 돌아와서 내가 혼처를 정해줄 테니까 결혼해라”.  
 
당시 10대 후반이면 결혼을 했으니까요. 나혜석에겐 첫 번째 시련이었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를 거역할 것인가. 고민하다 아버지를 거역하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요? 네. 학비를 끊습니다. 나혜석은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하고 조선에 돌아옵니다.  
 

2. ‘나의 일’을 평생의 숙제로 삼다
 
조선에 돌아오니,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똑똑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세계의 흐름을 꿰고 있는 나혜석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여성이 학교를 간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무엇을 배운들 할 일이 없다는 걸 이 때 처음, 처절하게 깨닫게 되죠.  
 
나혜석에게 ‘일’이란 평생의 숙제였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살 수 있지? 첫 번째는 경제적 자립입니다. 두 번째는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사람답게 나 자신의 생존을, 존재를 확인하면서 자존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 두 가지를 일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요.
 
나혜석에게 딱 하나 허용된 일이 있었으니 바로 교사였습니다. 1896년생 여성들이 처음 학교를 졸업하고, 할 수 있었던 직업은 90% 이상이 교사였어요. 전공 불문으로. 또 하나는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작가’라는 직업이 있었죠. 나혜석은 여주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글 쓰는 일을 병행했고 ‘나의 여교원 시대’라는 글을 남겼죠.  
 
이 시기에 나혜석에게 큰 사건이 있었는데, 연인이자 천재로 일컬어졌던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당연히 상실감이 컸겠죠. 이 시기에 나혜석은 두문불출했는데요.
 
이 와중에 자전적 소설인 ‘경희’(1918)를 발표합니다. ‘경희’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아 실현 과정을 모색한 최초의 근대 문학입니다. 도쿄 유학생 경희가 아버지로부터 ‘결혼 독촉’을 받는 이야기죠. 이 소설에 아주 인상적인 대목이 있죠.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저는 이 문장에 꼭 여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비롯해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넣어도 가능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나혜석은 아주 밑바닥을 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이 소설을 발표했고, 조금씩 세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1919년 3.1운동 때 여학생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5개월간 투옥됐고요. 나혜석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평생 고민한 사람이었어요.  
  
3. 나혜석이 ’모(母)된 감상기‘를 쓴 이유    
 
나혜석은 교토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전도 유망한 김우영과 1920년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결혼 소식이 동아일보 광고란에 실렸는데요. 그만큼 조선 땅이 다 알 정도로 두 사람은 유명했습니다. 나혜석은 세 가지 결혼 조건을 제시하는데요.  
 
첫째, 평생을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해주시오.  
 
이 조건은 김우영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만, 두 사람은 초기에 꽤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갑니다. 21년엔 만삭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 여성 최초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열었어요. 이틀 동안 수천 명이 왔다고 해요.  
 
바로 그 해에 딸을 낳는데요.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이라고 해서 김나열이라 이름 지었어요. 이 때 얼마나 결혼 생활이 행복했는지 짐작이 가시죠. 첫딸을 출산하고 일본 외무성 관리로 만주 단둥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서 이주합니다. (후략)
 

폴인의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표지 이미지. [사진 폴인]

폴인의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표지 이미지. [사진 폴인]

 
이후의 내용은 폴인의 웹페이지를 통해 15일 하루만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장영은 성균관대 교수가 쓴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는 각 분야에서 최초의 길을 걸었던 근대 여성을 조명하며 일하는 여성에게 영감과 용기를 줍니다.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 걸출한 문인이면서 승려였던 김일엽, 사회주의 혁명가 허정숙, 최초의 여자 변호사 이태영, 코스모폴리탄 천재 화가 천경자까지. 이들의 이야기를 15일 무료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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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99년 전 결혼한 나혜석이 내건 세 가지 결혼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