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바깥 세상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0]카르타고·로마의 격전지 트라시메노 호수

colorprom 2019. 5. 30. 19:24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0] 호수는 로마군 피로 물들었다… 육지선 최강이라고 자만했기 때문에


조선일보
                             
  • 트라시메노=송동훈 문명탐험가
    •          
    입력 2019.05.30 03:00

    카르타고·로마의 격전지 트라시메노 호수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의 트라시메노(Trasimeno) 호수는 고즈넉하다. 호수는 잔잔하기 이를 데 없고, 하늘은 이탈리아 특유의 푸름을 과시한다. 찌그러진 원형에 가까운 호수는 전체적으로 풍광이 아름답지만, 가장 뛰어난 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북쪽이다. 이탈리아반도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르는 아펜니노 산맥의 일부가 호수와 맞닿아 산수가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감상은 오늘날 이 지역에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주민들, 혹은 여행차 잠시 들른 관광객들의 몫일 뿐이다. 호수 북변 곳곳에는 한때 이곳이 로마제국과 카르타고제국이 격렬하게 충돌했던 전쟁터였음을 보여주는 표석들이 세워져 있다.

    전투는 기원전 217년 봄 혹은 초여름 어느 날 벌어졌다. 당시 로마 달력에 대한 혼란으로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4월 설과 6월 설이 갈린다(테오도어 몸젠·로마사). 그날 이곳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제국은 승리라는 똑같은 목표를 향해 질주했다. 승리는 카르타고에 돌아갔다. 정확하게는 카르타고 원정군의 총사령관 한니발(Hannibal)의 승리였다. 호수는 로마인들의 피로 물들었고, 이탈리아반도 전체가 경악했다. 시칠리아와 서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두 제국이 다퉜던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를 거둔 게 24년 전이었다. 이제 승자와 패자의 입장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국을 버리고 이국(異國)으로 가다

    카르타고에 강화조약은 평화를 가져왔다. 대가는 가혹했다. 시칠리아를 잃었고, 지중해라는 풍요로운 바다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상실했다. 자긍심 넘치는 카르타고인에게 무엇보다 치욕적인 건 국가의 존립을 로마의 의지에 맡겨야 하는 현실이었다. 지금은 로마가 새롭게 얻는 과실에 만족하고, 아프리카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지만 언제까지 그럴까? 국제정치는 언제나 국익(國益)과 비정(非情)이란 두 개의 톱니바퀴로 돌아간다. 로마가 국익의 이름으로 카르타고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날이 반드시 올 터였다. 그때 카르타고는 어찌할 것인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결단은 역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다. 카르타고도 예외가 아니었다. 패전국(敗戰國)의 여론은 갈렸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벌어질 것이 확실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전파와 지금 평화를 돈으로 살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주화파. 두 당파의 골은 깊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알프스를 통과한 한니발은 이곳 트라시메노 호숫가에서 최정예 로마군단을 궤멸시켰다. 그때의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최근에 세워진 조형물 뒤로 평화로운 호수의 일상만이 펼쳐져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차 포에니 전쟁(BC 264년~BC 241년) 막판에 카르타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바르카스 가문의 하밀카르는 주전파의 리더였다. 냉철했던 하밀카르는 조국의 한계를 직시했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주화파는 부패하고 무능했다. 자신이 시칠리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무사안일하게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린 사람들이었다. 조국에서 그는 무력했다. 하밀카르는 가족과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떠났다. 오늘날의 스페인, 이스파니아가 목적이었다.

    한니발, 알프스를 정복하다

    트라시메노 호수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이스파니아에서 하밀카르는 제2의 카르타고 제국을 세우고자 했다. 그는 원주민들을 정복했고, 도시들을 세웠고, 농업과 광업을 육성했다. 로마제국 정복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위한 기반 다지기였다. 도중에 전사했지만, 하밀카르의 꿈은 사위를 거쳐 아들 한니발에게 이어졌다(기원전 220년). 30대를 눈앞에 둔 한니발은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한 노련한 장군이었다. 그의 위대함은 앞으로 로마라는 당대 최강의 제국을 상대로 펼쳐질 장기간의 전쟁에서 입증될 터였다. 한니발은 권력을 물려받자마자 전쟁을 결심했다. 기원전 219년 봄, 이스파니아 남부 해안에 위치한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을 공격한 것이 신호였다. 사군툼을 정복한 한니발은 근거지인 이스파니아를 동생 하스드루발에게 맡기고 이탈리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 시기의 로마는 군사적 우위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에 취해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이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로 오는 길은 멀고 험했다. 피레네 산맥과 론강, 다시 알프스를 지나야 했다. 어떤 곳도 대군을 이끌고 쉽게 돌파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히 알프스는 자연이 이탈리아에 선물한 자연 방벽이었다. 해안과 알프스 사이의 좁은 통로들만 제대로 방어하면 충분했다. 더군다나 로마에는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동원 가능한 50만 병력이 있었다. 패장(敗將)의 이름 없는 아들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자신감은 태만을 낳았고, 태만은 한니발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로마 군대의 예상을 깨고 빠르게 전진했다. 시간 싸움에서 이긴 한니발의 군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알프스 앞에 섰다. 거친 자연과 호전적인 원주민들과 싸우며 한니발의 군대는 나아갔다. 그리고 돌파했다.

    로마의 대군을 연이어 격파하다

    알프스를 정복한 한니발의 군대를 기다리는 것은 북이탈리아의 풍요로운 평원이었다. 처음 이스파니아를 떠날 때 보병 5만명과 기병 9000명이었던 군대는 보병 2만명에 기병 60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비록 수는 줄었지만, 그들은 이미 알프스를 상대로 싸워 이긴 정예(精銳)였다. 허를 찔린 로마는 즉각 4만명의 대군을 편성해 북으로 보냈다. 한니발과 로마는 포강(江)의 지류인 트레비아 강변에서 격돌했다(기원전 218년). 기병대를 유연하게 활용한 한니발이 승리했다. 로마는 다시 대군을 편성해 한니발을 추격했다. 평민파의 리더인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서둘렀다. 한니발은 신중하게 적을 유인했다. 한니발을 상대로 한 승리를 자신이 속한 평민파의 공으로 돌리고 싶었고, 스스로를 대단한 장군이라고 여긴 플라미니우스는 무턱대고 트라시메노 호수와 아펜니노 산맥 사이의 좁은 길로 뛰어들었다. 한니발의 군대가 이미 이 길을 통과했다고 여기며. 전투의 문외한이 보기에도 이곳의 지형은 치명적이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던 플라미니우스는 왜 보지 못했을까? 과욕에 눈이 멀고, 상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니발 군대는 호수를 제외한 사방에 매복해 있었다. 전투는 세 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격전 중에 플라미니우스는 로마에 앙심을 품고 있던 북이탈리아 원주민 두카리우스에게 살해됐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로마 군대의 사기는 꺾였다. 그 이후는 카르타고군에 의한 일방적인 살육이었다(리비우스·로마사).

    이미지 크게보기
    트라시메노 전투 상상도. 호수가 북쪽에, 산맥이 남쪽에 배치돼 있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로마 바티칸의 지도 갤러리에 소장돼 있다. /위키피디아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로마로 가는 길이 한니발에게 활짝 열렸다. 로마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24년 전 로마는 바다의 왕자였던 카르타고를 상대로 바다에서 싸워 이겼다. 이제 육지의 강자 로마가 카르타고에 육지에서 패배한 것이다. 역사의 무게중심은 그렇게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승리에 자만하고 상대를 무시했던 로마의 자업자득이었다.


    [한니발, 3만 대군·말·코끼리 이끌고 알프스 어디로 넘었을까?]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은 3만명이 넘는 대군과 1만5000필에 달하는 말과 40마리 가까운 코끼리와 함께 알프스를 돌파했다.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그의 정예는 살아남았고,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이때 한니발은 어떤 루트를 통해 알프스를 넘었을까? 고대사의 흥미로운 논쟁거리 중 하나다.

    이미지 크게보기
    장엄하게 늘어선 알프스 산맥은 이탈리아를 지켜주는 자연 방벽이었다. 한니발, 샤를마뉴, 나폴레옹과 같은 정복자는 이 산을 넘었고, 그때마다 역사를 고쳐 썼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설(說)은 고대부터 분분했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몽주네브르(Montgenèvre) 고개를, 그리스 출신으로 로마에서 활동했던 폴리비오스는 작은 성베르나르(St. Bernard) 고개를 주장했다. 19세기 독일 역사가로 로마사의 대가인 몸젠은 폴리비오스 설을 지지한다.

    세계적인 권위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도 위의 두 코스를 포함, 다섯 가지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영국 퀸스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인 콜 드 트라베르세트(Col de Traversette) 지역에서 다량의 말과 노새의 배설물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논쟁이 재점화됐다. 연구팀이 이 배설물들을 대상으로 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한니발 원정 때인 약 2200년 전 것임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이 발견으로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루트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물적 증거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니발의 알프스 정복은 대단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2200년이 지나도록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궁금증을 품게 하고, 찾아 나서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30/2019053000120.html



    이병곤(sorkan****)2019.05.3012:14:45신고
    또 틀린것! 하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천신만고끝에 넘어가 도착한 북부이탈리아 평원에 대해 "알프스를 정복한 한니발의 군대를 기다리는 것은 북이탈리아의 풍요로운 평원이었다."고 했지만.. 이건 그야말로 상상이신데.. 그때 북부이탈리아 포강유역은 말 그대로 시골이었습니다. 북부이탈리아가 풍요로운 곳으로 변모한 것은 그 이후 한참.. 그것도 한참 후에 이야기 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디테일이 틀리면, 결론이 틀리고.. 결론이 틀리면.. 나머지는 역사 가지고 사기치는 "사기꾼" 됩니다.
    이병곤(sorkan****)2019.05.3012:07:26신고
    "승리에 자만해 자업자득"이 말을 송동훈씨 스스로 한 말이라면, 송동훈씨는 뭔가를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한 겁니다. 하니발은 로마군이 상상하지 않은 곳을 돌파해 로마군의 허를 찌른 겁니다. 또 하나 틀린 것! 하니발은 알프스를 정복한게 아니고, 알프스를 넘어간 겁니다. 진실은 디테일에 있고, 역사에서 주는 교훈은 상상으로 만들어내면 헛 것일 뿐입니다. 하긴 한국인데.. 한국사람인데.. 그딴 거는 그냥 패스!
    전승기(ce****)2019.05.3009:36:09신고
    세계사와 역사를 보면 현대사의 진행에서 참고할 내용이 너무 많다...
    정치가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설현욱(se****)2019.05.3007:55:28신고
    이탈리아 군이 아프리카에서 보이던 전력은 형편 없었지요..
    롬멜을 끌어들어 그나마 버티었지만 롬멜마저 패퇴하자 연합군은 1943년 7월 시칠리아로 상륙..
    이어 무솔리니 실각.. 21년간 통치해온 이탈리아 독재자의 몰락..
    바돌리오 내각은 연합군에 비밀협상으로 항복.. 독일군만 이탈리아 반도로 상륙하는 것을 막음..
    몬테카시노 전투를 거쳐.. -- 2차세계 대전사를 재미로 조금조금 보다 보면
    실제 인물이 등장하는 기록물이기에 현실성이 남다르지요..
    유민호(mik****)2019.05.3009:20:29신고
    지금 이탈리아인과 로마 시대 로마인을 같은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라티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종이고요. 로마가 1000 여년간 세계를 제패하면서 노예등으로 흘러들어 온 인구가 기존 인구보다 더 많고, 그 외에도 로마 인근 각지에서 흘러들어 온 인종들이 망라된 상태가 지금의 이탈리아인 들입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30/20190530001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