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세상]

[한국][초저가]'9900원 청바지'의 위험 (이인열 차장, 조선일보)

colorprom 2019. 5. 2. 14:38



[데스크에서] '9900원 청바지'의 위험


조선일보
                             
             
입력 2019.05.02 03:14

이인열 산업1부 차장
이인열 산업1부 차장


12년쯤 전 일이다.

지금은 사라진 당시 세계 1위 휴대폰 업체 노키아는 글로벌 시장을 충격으로 몰고 있었다.

바로 '초저가(超低價)폰'이었다.

지금의 대당 80만원대가 넘는 스마트폰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3만~5만원짜리 휴대폰으로

노키아는 시장을 석권했다.

특히 매달 600만명씩 가입자가 늘고 있던 인도 시장에서 노키아는 맹공을 퍼부었다.

LG전자도 2300루피(약 4만8000원)짜리 KG110 휴대폰을 내놨다.

필자는 당시 인도에 주재하면서 LG전자 KG110의 제원을 뜯어본 적이 있었다.

핵심 부품인 플래시메모리는 미·일 합작사인 스팬션에서, LCD(액정 화면)는 대만(臺灣) 업체 톱폴리에서,

금형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사출은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받는 등

수많은 국적(國籍)의 부품과 공급망이 망라돼 있었다.

원래 제조업은 제품을 만든 뒤 적당한 이윤을 남겨 파는 것이다.

그런데 초저가 경쟁이 벌어지니 가격부터 정해서 그 값에 맞추려고

가장 싼 부품을 만드는 업체를 전 세계에서 뒤져서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걸 '공급자망 혁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제품은 '메이드 인 코리아'도 '메이드 인 인디아'도 아닌 '메이드 인 글로벌'이었다.

요즘 유통가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면 그때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달 초 이마트9900원짜리 청바지를 내놨다.

가격을 맞추려는 이마트의 노력은 실로 가상했다.

원단 구매 등에 에이전트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 작년 2월 면화 생산지인 인도와 파키스탄에 직원을 파견했다. 여기에 원단 시세가 10%쯤 싼 3월에 주문하고, 가죽 장식 등도 모두 생략했다. 그래서 9900원을 맞춘 것이다.


이마트뿐만 아니다. 요즘 국내 유통가의 최대 키워드는 '초저가'이다.

쿠팡 등의 출현에다 기존 오프라인 대형 할인점도 가세하면서 확전 일로의 양상이다.

12년 전 벌어진 일이 제조업발(發) 초저가 혁명이라면 지금은 유통발 초저가 혁명이다.

유통업체도 원래는 제품을 떼다가 적당히 이문을 남기는 방식으로 영업했다.

그런데 이제는 가격부터 정해놓고 여기에 맞는 물건을 공급할 제조 업체를 선택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유통 업체들'초저가'에 맞춰 구매처를 해외로 돌릴 것이고,

이들을 붙잡기 위해 더 많은 중소기업이 싼 인건비 등을 찾아 덩달아 해외로 나갈 것이다.


앞으로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을 한국 제조 업체, 더 엄밀히 말해 한국 중소기업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글로벌 초저가 경쟁 속에 뛰어들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그고 골목 상권을 보호하는 규제에 기대서

중소기업들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통에 대한 '착한 규제'가 제조업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독(毒)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규제 당국은 알고 있을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1/20190501030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