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바깥 세상

[일본]구마모토, 메이지유신을 지켜내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colorprom 2019. 3. 30. 15:17



일본역사기행

구마모토

구마모토, 메이지유신을 지켜내다

글·사진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나카쓰의 마에노 료타쿠, 스기타 겐파쿠와 함께 《해체신서》 번역… 일본 근대화의 길 닦은 蘭學 개척
⊙ 구마모토의 요코이 쇼난, 公共의 정치와 開國論 주장… 사카모토 료마 등에게 큰 영향 미쳐
⊙ 구마모토 수비사령관 다니 다데키, 농민 출신의 징집병 이끌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군 저지
2016년 지진 이후 보수공사 중인 구마모토성. 구마모토성은 1877년 세이난전쟁 때 파괴됐다가 1960년 재건됐다.
  일본 규슈(九州) 오이타현(大分縣) 나카쓰시(中津市) 오에의가사료관(大江醫家史料館). 나는 넋을 잃고 245년 전에 나온 책 한 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해체신서(解體新書)》! 구마모토(熊本)로 가는 길에 일부러 나카쓰를 다시 찾아온 것은 순전히 이 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2017년 12월, 메이지(明治) 시대의 교육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만나러 이곳 나카쓰에 왔었다(《월간조선》 2018년 2월호 ‘후쿠자와 유키치의 고향 나카쓰’ 참조). 그의 생가를 둘러보고 숙소가 있는 벳푸(別府)로 돌아간 후, 뒤늦게 나카쓰 오에의가사료관에 《해체신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땅을 쳤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생가에서 오에의가사료관은 불과 300여m 거리였다.
 
  《해체신서》는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 아니 일본의 근대를 연 책이다. 《타펠 아나토미아(Ontleedkun-dige Tafelen) 1734》로 알려져 있는 네덜란드어 해부학 책을 번역한 것이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기 2년 전으로, 조선에서는 영조(英祖) 치세의 말기였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1733~1817),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1723~1803)이다.
 
 
  일본 의사들, 서양 해부학 책을 번역하다
 

스기타 겐파쿠, 마에노 료타쿠 등이 번역한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 《해체신서》는 이후 난학 붐을 불러일으켰다.
  《해체신서》를 번역하기 3년 전인 1771년 3월, 세 사람은 사형수의 시신을 해부하는 모습을 참관했다. 이들이 눈으로 직접 본 인체의 속은 한의학 책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스기타 겐파쿠와 마에노 료타쿠가 소장하고 있던 《타펠 아나토미아》에 그려진 인체해부도 그대로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그때까지 인체의 구조조차 모르고 의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自愧感)을 느꼈다.
 
  〈적어도, 의술로서, 서로가 주군님을 모시는 몸으로, 그 바탕이 되는 인체의 진짜 구조를 모른 채 지금까지 하루하루 이 업(業)을 해왔다는 것은 면목이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의 체험을 바탕으로, 대략적이나마 인체의 진짜 구조를 판별하면서 의술을 행한다면, 이 업에 종사하고 있는 변명이라도 될 것이다.〉 (스기타 겐파쿠의 회고)
 
  서양의 해부학 책을 번역하기로 결심하지만, 이들 중에 네덜란드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바로 나카쓰번 출신의 의사 마에노 료타쿠였다. 네덜란드인들의 상관(商館)이 있는 나가사키에 유학한 적이 있는 마에노 료타쿠는 ‘롱구(Iung)’는 폐, ‘하르토(Hart)’는 심장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학 전문서적을 번역할 수준은 당연히 아니었다. 네덜란드어의 문장구조나 정관사(定冠詞) 등을 전혀 몰랐다.
 
  세 사람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타펠 아나토미아》의 번역에 달려들었다. 며칠 동안 세 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문장 한 줄을 간신히 번역하는 날도 있었다. 해독이 정 안 되는 부분은 건너뛰었다. 책의 번역을 제안한 사람은 스기타 겐파쿠였지만, 번역 작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마에노 료타쿠였다. 번역 초기에 그나마 네덜란드어 철자라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1774년 8월 《해체신서》가 나왔을 때, 역자(譯者) 이름에는 마에노 료타쿠가 없었다. 결벽주의자던 마에노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번역서를 내놓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런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학자로서 있을 수 없는 매명(賣名) 행위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세상 사는 요령이 좋은 스기타 겐파쿠는 ‘올바른 의학의 대강’만이라도 세상에 알리는 것이 급선무이고, 부족한 부분은 차츰 보완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스기타 겐파쿠는 마에노 료타쿠에게 책의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하지만, 마에노는 거절했다.
 
  《해체신서》는 ‘난학(蘭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열었다. 난학은 ‘오란다, 즉 홀란드(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뜻이다. 난학은 의학에서 시작해 과학기술・군사・항해・천문・지리 등을 아울렀다. 난학이 있었기에,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에도(江戶・도쿄) 앞바다에 나타나 수호(修好)조약 체결을 강요하기 이전에 이미 서양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네덜란드어로, 또 미국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나카하마 만지로(中濱萬次郎)의 통역으로, 의사소통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후일의 조선과는 달리 국제 정세를 이해하거나, 서양 문물을 흡수하는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스기타 겐파쿠는 ‘난학의 개창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말년에는 부(富)와 명성도 누렸다. 반면에 마에노 료타쿠는 가난 속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이 학문(난학)을 열게 된 천조(天助)의 하나는 료타쿠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던 스기타 겐파쿠는 마에노를 방치했다.
 
 
  일본의 근대를 연 책
 
  그리 크지 않은 오에의가사료관의 마루에 오르면 유리진열장 안에 《해체신서》와 《타펠 아나토미아》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작은 책이 역사를 바꾸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해체신서》를 보면, ‘이런 것이 근대’라는 생각이 든다. 스기타와 마에노는 ‘Kraakbeen’이라는 단어를 보고 ‘뼈(Been)의 말랑말랑한 부분’이라 하여 ‘연골(軟骨)’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인체를 직접 해부해보고 해부학 책을 쓴 서양인만은 못해도 그에 100분의 1만큼이라도 과학적 사고(思考)를 해본 셈이다. 더 나아가 일본인들은 난학을 통해 중국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같은 나카쓰 출신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후일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는 정신적 바탕은 여기서 시작된 셈이다.
 
  《해체신서》를 넣어둔 진열장을 사이에 두고 스기타 겐파쿠와 마에노 료타쿠의 초상이 있다. 스기타 겐파쿠는 삐쩍 마른 얼굴인 반면, 마에노 료타쿠는 조금 퉁퉁한 얼굴이다. 하지만 눈썹이 위로 치솟고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그의 개결(介潔)한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해체신서》가 나온 지 120년 뒤, 조선에서는 동학교도 혹은 농민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총알도 막아준다는 부적을 품에 넣고서 주문(呪文)을 외우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에게 쏟아진 것은 무라타(村田) 소총탄과 개틀링(Gatling) 기관포탄이었다. 그 난리를 역사에서는 ‘반(反)봉건 근대화’를 추구한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한다. ‘반봉건’은 모르겠고, 거기에 무슨 ‘근대’가 있었다는 것일까? 그로부터 12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부사업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사업을 벌이고 있다. 입맛이 쓰다.
 
 
  요코이 쇼난
 
요코이 쇼난의 글씨. 쇼난은 국수주의 성향의 유학자였으나, 개국론자로 바뀌었다.
  구마모토는 온천으로 유명한 규슈의 중서부 도시다. 구마모토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초기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요코이 쇼난(横井小楠・1809~1869)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구마모토가 메이지유신 이후 최대의 내란인 세이난전쟁(西南戰爭・1877)의 격전지이기 때문이다.
 
  요코이 쇼난은 복합적인 인물이다. 쇼난(小楠)이라는 이름은 다이난공(大楠公)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1336)를 흠모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14세기 초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을 도와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친정(親政)체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싸운 무장(武將)이다. 그는 나중에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의 군대에 패해 죽는데, 근대 이전 일본 역사에서 ‘천황을 위해 죽은 유일한 사무라이’였다. 이 때문에 그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천황숭배론자와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의 우상(偶像)이 됐다.
 
  ‘쇼난’이라고 자호(自號)한 데서 보듯, 요코이 쇼난은 일본 중심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유학자(儒學者)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실학자이기도 했다. 서양에 대해서도 열려 있었다. 청(淸)나라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접한 후 쇄국(鎖國)에서 개국(開國)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세습제를 폐지하고, 선거로 국왕을 선출하는’ 미국의 대통령제를 높이 평가했고, 서양식 의회제도 도입을 통해 유학에서 말하는 인정(仁政) 실현을 꿈꾸었다.
 
  무엇보다 요코이 쇼난은 ‘공공(公共)의 정치’를 주창했다.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서 ‘천하의 정치’를 함께 토론하는 것을 말한다. 요코이 쇼난의 이런 진보적 생각은 그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에게 보낸 〈해군문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신설된 해군에는 기존의 질서를 적용시키지 않는다. 필부(匹夫)라도 능력이 있으면 일함일군(一艦一軍)의 수장(首長)으로 삼는다. 귀족이라도 능력이 없으면 쓰지 않는다. 세계를 널리 돌아보고 군사적인 면은 물론 각 구성원의 정치적 식견도 서양의 해군을 능가하는 강력한 집단을 만든다.〉
 
  요코이 쇼난은 행동하는 지성(知性)이었다. 후쿠이번(福井藩) 번주(藩主) 마쓰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도쿠가와 요시나가(德川慶永)라고도 함. 1828~1890]에게 초빙되어 번정(藩政)개혁을 추진했고,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막부개혁안을 내놓았다. 1867년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한 대정봉환(大政奉還)도 그가 일찍부터 주장한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과 행동은 사카모토 료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메이지유신 후 요코이 쇼난은 당시로서는 고령인 60세에 참여(參與)라는 벼슬을 받아 신정부에 참여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1년 후(1869년) 그가 일본에 기독교를 퍼뜨리려는 것으로 오해한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 사무라이에게 암살당했다.
 
 
  神風連의 亂
 
임진왜란 당시 악명을 떨친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의 영주였다.
  구마모토성으로 향했다. 요코이 쇼난의, 세이난전쟁의 흔적이 이곳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는 옛 무사의 좌상(坐像)이 서 있다. 청정공(淸正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동상이다.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장(倭將) 가운데 조선인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장수다.
 
  아쉽게도 구마모토성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2016년 지진으로 성이 허물어져 보수공사 중이기 때문이다. 포탄 모양으로 된 세이난전쟁기념비를 보고 싶었는데…. 시내에 있는 요코이쇼난기념관도 보수공사를 하기 위해 문을 닫았다. 구마모토성이나 요코이쇼난기념관 모두 4~5년 후에나 문을 열 수 있다고 한다. 숭례문이 소실(燒失)된 후 부실 논란을 빚으면서 후다닥 복원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구마모토성 앞 공원의 古木. 이 나무는 신푸렌의 난, 세이난전쟁을 모두 지켜보았으리라.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마침 성 인근 구마모토현립미술관에서는 ‘요코이 쇼난과 그의 시대’라는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요코이 쇼난의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다. 전시장 입구 테이블에는 ‘시습관(時習館)’이라는 술이 놓여 있었다. 전시회를 후원하는 이 지역 술 회사에서 내놓은 술이다. 알고 보니 시습관은 구마모토번이 설립한 번교(藩校)의 이름이다. 막부 말기 각 번에서는 경쟁적으로 번교를 설립해 인재를 길러냈다. 그나저나 술 이름에 ‘시습’이라니…. 문득 ‘학이시습(學而時習)’으로 시작하는 《논어(論語)》가 생각난다.
 
  전시회를 돌아본 후 구마모토성 앞 공원을 둘러보았다. 아침에만 해도 조금 쌀쌀한 것 같더니, 점심이 가까워지면서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바람에서는 봄 냄새가 났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고목(古木) 앞에는 ‘신푸렌[神風連・경신당(敬神黨)이라고도 함]의 난’ 당시 격전지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신푸렌의 난’은 1876년 10월 신토(神道)를 맹신하는 몰락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들은 한때 구마모토진대(鎭臺・수비대) 사령관 등을 살해하고 기세를 올렸으나, 곧 진압됐다. 이 난은 같은 해 9월 조슈(長州)에서 일어난 ‘하기(萩)의 난’과 더불어 세이난전쟁의 예고편이었다.
 
 
  維新의 群像
 
다카하시공원에 있는 維新의 群像. 왼쪽부터 사카모토 료마, 가쓰 가이슈, 요코이 쇼난, 마쓰다이라 슌가쿠, 호소카와 모리히사이다.
  다카하시(高校)공원에는 유신군상(維新群像)의 동상이 서 있다.
 
  시리도록 파란 봄 하늘 아래 요코이 쇼난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을 맺은 인물들이 나란히 서 있다. 요코이 쇼난의 왼쪽에는 사카모토 료마와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가 있다. 가쓰 가이슈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 해군의 요직을 역임한,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과 같은 인물이다. 사카모토 료마와 가쓰 가이슈 사이에는 지구본이 놓여 있다. 가쓰 가이슈가 료마에게 세계정세를 가르쳐주는 듯한 모습이다. 요코이 쇼난의 오른쪽으로는 그를 발탁한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슌가쿠와 히고(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모리히사(細川護久)가 서 있다. 1993~1994년 제79대 일본 총리를 지낸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는 호소카와 모리히사의 증손자이다.
 
  부럽다. 일찍부터 세계를 보면서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지식인과 사무라이들, 기득권자이면서도 작게는 자신의 영지(藩), 크게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 끊임없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개혁을 추진한 봉건 영주[다이묘(大名)]들….
 
  그런데 유신군상 동상 옆으로 또 하나의 동상이 보인다. 서양식 군복 차림에 군도(軍刀)를 짚고 앉아 있는 군인의 동상! 이름을 보니, 아! 다니 다데키(谷干城・1837~1911)다. 생각해보니 당연히 여기에 동상이 있어야 할 사람이다. 그가 바로 세이난전쟁 때 구마모토진대 사령관으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1828~1877)가 이끄는 사쓰마(薩摩) 반란군을 저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구마모토 공방전
 
  메이지유신의 일등공신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신 이후 토사구팽(兎死狗烹) 신세가 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1873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다. 하지만 외정(外征)보다는 내실(內實)을 다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에게 밀려 실각(失脚)돼 고향인 사쓰마로 낙향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고향에 사학교(私學校)를 세우고 제자들을 길러내는 한편, 교외의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소일했다. 1877년 2월 사이고 다카모리는 제자들에게 옹립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심신이 병든 상태에서 피동적으로 일으킨 반란이었다.(《월간조선》 2018년 12월호 ‘한국근대사를 흔든 유신의 심장 가고시마를 가다’ 참조)
 
  규슈 중부의 구마모토는 남규슈 사쓰마에서 올라오는 사이고 다카모리군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要衝)이었다. 구마모토에 이른 사이고 다카모리는 육군 대장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육군 소장 다니 다데키에게 “도쿄로 상경,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오쿠보 도시미치)의 잘못에 대해 천황에게 간언(諫言)하려 하니, 막지 말라”고 호령했다. 하지만 다니 다데키는 옛 상관의 명령을 일축했다.
 
  “이곳을 지키는 장수로서 정부의 명령 없이는 길을 내줄 수 없다. 그리고 간언하러 갈 것이면 혼자 가면 될 일이지,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가는 게 웬 말이냐?”
 
 
  한 명의 군인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다
 
세이난전쟁 당시 사쓰마군의 進軍을 저지한 다니 다데키의 동상.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쓰마군은 1만3000여 명, 구마모토 수비군은 3000여 명에 불과했다. 사쓰마군은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용맹한 사무라이들이었고, 구마모토 수비군은 메이지유신 이후 징병령(徵兵令)에 의해 소집된 농민 출신의 국민군이었다. 사쓰마군은 구마모토 수비군을 우습게 보고 공격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다.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7주간의 혈전(血戰) 끝에 다니 다데키의 수비군은 결국 사쓰마군을 격퇴했다. 농민 출신의 국민군이 사무라이 군대를 이긴 것이다. 사쓰마군은 가고시마로 후퇴했지만, 그해 9월 정부군에 패배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 자결했다.
 
  세이난전쟁 발발 당시 일본 육군 총병력은 3만명에 불과했다. 전쟁으로 정부군과 사쓰마군은 각각 7000명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메이지 10년의 전역(戰役)’ 이후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했다. 세이난전쟁은 메이지유신이 안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변곡점(變曲點)이었다.
 
  그 역사의 고비에 구마모토에 다니 다데키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다. 후일 귀족원의원과 농상무대신 등을 지내기는 했지만, 다니 다데키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나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등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구마모토성, 아니 메이지유신을 지켜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간성(干城)’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대단한 선각자가 아니더라도 된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몫을 제대로 다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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