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로물루스가 처음 정착한 팔라티노 언덕
로마는 한때 제국이었고, 오늘은 도시다. 과거에도 세상을 매혹시켰고, 지금도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우리에겐 친숙하다. 도시 곳곳의 소나무 때문이다. 특히 도시 한가운데 있는 팔라티노 언덕(Monte Palatino)은 쭉쭉 뻗은 소나무들의 우아한 자태로 유명하다. 이곳에 서면 고향에 온 듯 낯익고 푸근하다. 포로 로마노를 가로질러 올라가게 되는데, 언덕 위에 올라서면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바람과 풍광! 남국의 따사로운 햇살을 잊게 해줄 만큼 시원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온다. 탁 트인 전망도 압권이다. 로마제국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위풍당당한 콜로세움과 아스라이 보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온 로마가 발아래 놓인다. 로물루스(Romulus)가 왜 이곳에 로마를 세웠는지 알 것 같다. 왜 이곳에 부유한 로마 귀족들의 대저택들이 즐비했는지, 왜 이곳에 황제의 궁이 있었는지 알 것 같다.
로마는 위대한 제국이었다. 특히나 긴 생명력으로 유명하다. 서로마제국은 1200년 동안 이어졌고, 동로마제국은 무려 2200년이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장수 제국 로마를 상징하는 표현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Rome wasn't built in a day)'이다. 로마제국은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어느 한 세대의 번영만으로 만들어진 제국이 아니란 뜻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과 세대가 오랜 세월 희생하고 노력함으로써 이뤄낸 제국이다. 그러나 그 긴 세월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으라면 역시 '시작'일 것이다. 로물루스가 이곳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세운 바로 그 순간! 제국의 모든 것은 그때 첫걸음을 떼었다.
◆늑대 소년, 도시를 세우다
제국의 국부(國父) 로물루스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다. 신화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단군신화가 그러하듯이 신화는 고대인의 사유와 표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로물루스의 건국신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생각과 상징은 무엇일까? 양치기 우두머리 로물루스의 신화 속 정체는 '신(神)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전쟁의 신 마르스, 어머니는 알바 롱가(Alba Longa)의 왕녀 레아 실비아(Rhea Silvia)였다. 알바 롱가는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이아스 혹은 그의 후손이 멸망하는 트로이를 탈출해 천신만고 끝에 이탈리아 중부, 라티움에 세운 도시국가다. 어머니가 왕녀였으나 순결을 서약했던 신녀(神女)였던 관계로, 로물루스와 그의 쌍둥이 동생 레무스(Remus)는 비밀리에 버려졌다. 어미 늑대가 형제를 발견해 젖을 먹여 키웠다. 양치기들이 형제를 발견했고, 무리 안에 받아들여 함께 자랐다. 로물루스는 어려서부터 양치기들 사이에서 리더로 두각을 나타냈다. 성년이 된 로물루스는 자신을 따르는 3000여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를 세웠다. 도시라기보다는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으로 펼쳐진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촌락에 가까웠을 것이다. 로물루스는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 '로마(ROMA)'라 불렀다. 기원전 753년 4월이었다. 건국 과정에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쌍둥이 동생 레무스는 제거됐다.
나라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통치 시스템을 정비했다. 핵심은 왕, 원로원, 민회 세 기관 간의 견제와 균형이었다. 왕은 종교·정치·군사의 최고책임자지만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민회에서 선출됐다. 유력한 시민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왕에게 조언하고 왕을 도와 로마를 이끌었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훗날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인데, 로마인들은 그 영광을 로물루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통치 시스템과 더불어 로물루스가 최우선적으로 힘을 쏟았던 건 부국강병이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수많은 부족과 도시국가가 난립하는 정글이었다. 이웃과 싸움이 다반사였다. 패배는 곧 죽음을 뜻했다.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했고, 그 토대는 경제적 번영이었다. 노동력이 생산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고대 사회에서는 인구가 국력의 척도였고, 번영의 기초였다. 로물루스는 로마의 신전에 들어오면 누구도 체포되지 않는다고 선포하여 인근의 범죄자와 도망자를 끌어들였다. 기발한 이민 정책에 힘입어 로마의 인구는 급성장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을 낳았다. 로마로 흘러들어 온 범죄자와 도망자 대부분이 남자였던 탓에 여자가 부족해진 것이다. 도시 분위기는 흉흉해졌고, 출산 부족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로물루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 납치극'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웃 사는 사비니 부족을 초대해 축제를 열고,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사비니 처녀들을 무력으로 강탈한 것이다. 술에 취한 채 기습당한 사비니 남자들은 하릴없이 도시 밖으로 내쫓겼다. 로마 남자들은 납치한 사비니 처녀들을 아내로 맞았다. 로물루스 본인도 사비니 왕의 딸인 헤르실리아(Hersilia)와 결혼했다. 로마의 만행은 사비니 부족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전쟁이 벌어졌다. 두 부족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최종 승자는 로마였다.
◆패자를 포용하다
패배한 사비니 부족 전체의 운명이 로물루스에게 달렸다. 이때 로물루스는 승자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로마와 사비니가 동등하게 함께 살자는 예상 밖의 제안을 했다. 모든 권력도 두 부족이 나눠 갖자고 했다. 사비니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는 공동 왕이 됐고, 두 부족은 원수에서 가족이 됐다. 로마의 인구는 순식간에 두 배로 늘어났다. 국력도 배가됐다. 그렇게 로마는, 패자(敗者)조차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라티움 최강자로 발돋움할 준비를 마쳤다. 로물루스는 왕위에 38년 머무른 후, 비바람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로마인들은 그가 신이 됐다고 여겼다('플루타르크 영웅전').
로물루스 이래로 로마의 권력자들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곳에는 황제들이 살았던 황궁 유적이 즐비하다. 그 유적들은 전성기 로마의 힘과 부를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진짜 감동은 언덕 구석에 있는 '로물루스의 오두막'이라 불리는 허름한 옛 주거지에서 느낄 수 있다. 로물루스가 직접 살았던 곳이 아니라,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됐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두막이란 명칭에 어울리게 참 보잘것없다. 사실에 근거한 로마제국의 출발은 이처럼 한미했다. 양치기, 도망자, 농부들이 모여 세운 초미니 국가였다. 그런 로마였지만 결국에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무엇을 통해서? 사비니 부족의 예에서처럼 패배한 적조차 받아들여 한 식구로 만드는 포용의 힘을 통해서였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고, 바다는 한 줄기의 강물도 밀어내지 않는다'는 중국의 옛말처럼, 로마는 모두를 끌어안음으로써 제국이 됐다. 로마인들이 건국 시조 로물루스의 신화를 통해 후손의 마음속에 각인시키고자 했던 것이 '포용'이었다면, 그들의 바람은 성공한 셈이다.
[사비니 여인의 비극]
납치돼 결혼하고… 남편과 친정의 전쟁 말리고
사비니 여인의 비극적 운명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녀들은 강제로 납치되어 가족과 떨어져야 했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 했다. 그들의 아이를 낳아야 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원한은 잊히고 가족이 탄생했다. 로마와 사비니의 전쟁은 그녀들에게는 내 아이의 아버지인 남편과 친정 식구들이 벌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사비니 왕의 딸로 로물루스와 강제 결혼한 헤르실리아는 두 부족의 화해를 눈물로 호소했다. 프랑스 혁명기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사비니 여인(the Sabine Woman)'은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화폭으로 옮겼다. 그림 왼쪽의 나이 든 남자는 사비니의 왕 타티우스, 오른쪽의 젊은 남자는 로마의 왕 로물루스다. 젊은 로물루스의 방패에는 'ROMA'와 늑대의 젖을 먹는 쌍둥이 형제가 그려져 있다. 두 남자 사이에 뛰어들어 싸움을 말리고 있는 흰옷의 여인이 타티우스의 딸이자 로물루스의 아내인 헤르실리아다. 그녀를 중심으로 사비니 여인들은 아이들을 내세워 비극적인 싸움을 멈춰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프랑스 화가 푸생, 이탈리아 조각가 잠볼로냐 등 수많은 예술가도 이 소재를 작품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