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바깥 세상

[일본][35]임진왜란 전야의 역사적 교훈 (신상목 대표, 조선일보)

colorprom 2019. 3. 8. 15:21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5] 임진왜란 전야의 역사적 교훈


조선일보
                             
  •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          
    입력 2019.03.08 03:12

    칼럼 관련 일러스트

    1590년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김성일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엇갈리는 보고를 한다.

    외침(外侵)을 경계한 황윤길은 옳았고 일본의 허세로 치부한 김성일은 틀렸는가?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론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한 과정이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중국을 복속시키겠다는 '당국평정(唐國平定)'을 호언하고 있었다.

    류큐조선을 먼저 입조(入朝)시키고 저항하면 칠 것이라는 소문이 규슈 일대에 쫙 퍼져 있었다.

    소문은 사절의 귀에도 들어갔다. 귀를 의심케 하는 이 불온한 소문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때 중요한 존재가 쓰시마(宗)씨였다.

    그들은 조선일본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아야 하는 변경(邊境)인들이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조선의 환심을 구하던 씨였지만 히데요시 치하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히데요시씨에게 조선의 입조 동의를 받아오라는 명을 내린 터였다.

    포상의 유혹과 처벌의 엄포가 수반되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씨는 일본을 선택한다.

    조선 사절을 맞이하는 예를 격하하고 거리를 둔 것은 그러한 의중이 반영된 신호였다.

    사절들은 씨의 무례에 노발대발하면서도 그 이상의 행간(行間)을 읽지 못했다.

    서양과 교류를 시작한 일본은 전례 없는 전력 상승과 대외 인식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

    통신사들의 보고는 막연한 인물평이나 주관적 추측에 근거할 뿐,

    어느 쪽도 정세를 꿰뚫어보는 통찰과 입체적 분석이 없었다.

    무엇보다 씨를 휴민트(HUMINT)로 포섭하는 전략적 감각이 있었다면

    일본 사정에 깊숙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나,

    조선씨를 왜구의 후예라 무시할 뿐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았다.

    훗날 선조황윤길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통한으로 여겼다고 하나

    애초부터 피상적 관찰이나 희망적 사고에 불과한 보고를 듣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도리는 없었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하는 임진왜란 전야의 교훈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7/2019030703449.html


    이원열(cys0****)모바일에서 작성2019.03.0809:43:41신고
    일본은 당시 칼찬 무사만 백만명이였다.
    길거리마다. 칼차고 휘젓고 다니던 살기가 가득한 사무라이를 김성일은 눈이 없어 못 보았겠는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자들이 나라를 불행하게 만드는 법이다.
    이원열(cys0****)모바일에서 작성2019.03.0809:17:58신고
    조일전쟁이 끝나고 국교정상화를 일본이 요구할때
    일본의 애도 막부는 조선의 비겁함을 알고 조선을 다시 협박한다.
    조선이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협박에
    조선은 무릎을 꿇고 일본의 요구 모두를 들어준다.
    그예가 부산 왜관의 도자기 공장설립이다.
    조선이 일본에 도공을 제공하고 무상으로 전국에서 흙 수백톤을 증발하고 땔감까지 조달하여
    조선자기를 만들어 일본에 공짜로 공납한 사실은 왜 입을 닫는 것인가?
    이것이 조선의 실체고 역사가들의 비겁함이다.
    그때 조선의 도공과 기술 모두를 일본이 가져다가 승승장구한것이다.
    이원열(cys0****)모바일에서 작성2019.03.0809:06:04신고
    그당시 일본은 조선에서 싸운것은 가난과질병과 배고픔 뿐이 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군병의 기록을 보면 조선이 이렇게 가난한 줄은 몰랐다고 할 정도 였다.
    일본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 무역이 발달하여. 유럽과무역을 하고 스스로 유럽으로 사절을
    보내고 멕시코의 스페인 식민지하고 은을 교환하여 필리핀과 삼각무역도 하던 애들이 였다.
    조선은 무엇을 했는가? 도덕전쟁중이 였다.
    자신의 도덕보다. 남의 비도덕을 공격하여 적폐사냥하던 도덕명분 이상국가.
    이것이 조선 망국의 정치사다.
    현 좌파정권 역시나 도덕적우위에 있지않고 인간의 욕망과 권력욕을 충분이 발휘하고있다
    민심은 팽가친채로 말이다
    이원열(cys0****)모바일에서 작성2019.03.0808:57:20신고
    이건 아니죠. 당시 조선은 분명 일본침공을 일반 백성들까지 다 알고 있었어요.
    몇해전부터 토정이지함 조차 왜군 단병 수만이 몰려와도 조선은 뿌리부터 뽑힌다 했고.
    몇몇 지략가들은 흥인지문으로 남색옷을 입은 왜병이 무혈입성한다 까지 예견된 상황이였다.
    사실 싸울 힘고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에 평화의 막연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15일 서울 입성은 사실 싸움없이 걸어 소풍온듯 조선을 제압한 것이다.
    상업과 공업을 잡세라는 명목으로 중과세 하고 농업에 치중하니 산업이 쇠퇴하고
    농업생산은 반대로 떨어지고 도덕정치이상정치 실현의 성리학은 상대를 적폐 몰이 명분 삼아 살상하고 관료부패하고 백성은 노비로 만들어 옭아메려 하던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무능하고 비겁한자가 지?낼 나라는 없는법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7/20190307034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