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철 코끼리, 죽은 도시를 年200만명 관광지로
조선일보
낭트(프랑스)=원종환 탐험대원 취재 동행=김선엽 기자 입력 2019.03.14 03:01
[청년 미래탐험대 100] [5] 도시재생 교과서 프랑스 낭트
'문화가 힘이다' 21세 원종환씨
프랑스 서쪽 끝 작은 도시 낭트의 강가 광장은 환호와 웃음으로 가득했다.
내 키의 7배, 4층 건물 높이인 거대한 기계 코끼리가 광장을 어슬렁거리며 물을 뿜어대자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자지러졌다.
괴짜 발명가가 동네 고물상을 탈탈 털고 철물점을 밤새 뒤져 만들어낸 듯한 거대한 코끼리는
'끼르륵' 소리를 내뱉었다.
이곳은 '해저 2만리'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꿈이 현실로 부활한 기계동물 테마파크
'레마신드릴(Les Machines de l'Ile·섬의 기계들)'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소가 있던 땅이다.
1980년대 말 프랑스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문 닫은 공장에 버려진 고철·목재 등이
코끼리의 재료로 쓰였다.
산업 구조가 바뀌어 낡은 공장들이 무덤처럼 썩어갈 때
낭트시(市)는 막대한 돈(약 128억원)을 들여 이 공원을 지었다.
낡은 건물을 밀어버리는 대신 이를 보전하는 이같은 '낭트식 재생'과 마주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바나나 창고는 갤러리로 쓰이고, 비스킷 공장은 극장으로 변했다.
쇠락을 변신의 에너지로 끌어다 쓴 반전이었다.
지난해 도시재생 관련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나는 낭트를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낭트 칙령'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재생의 교과서'라는 이 도시의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이달 초 찾은 이 해안 도시의 골목골목은 변신의 기적으로 가득했다.
18세기 노예무역, 이후엔 조선·제조·물류업으로 흥했던 낭트가
이 산업들이 무너진 후 예술이란 새 옷으로 새끈하게 갈아입은 모습이랄까.
낭트에서 마주친, 도시가 되살아나는 방법을 기록한다.
①바나나 창고→갤러리 카페
사람들이 줄지어 자꾸 들어가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겉에서 보면 그저 투박한 콘크리트 건물일 뿐인데.
인파를 따라 발을 들인 건물 안엔 감각적인 카페가 숨어 있었다.
같은 건물에 식당·클럽·전시관까지 들어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루아르강 쪽으로 난 통유리창을 보며 한껏 멋 낸 이들이 포도주를 홀짝거리는,
완전 프랑스적인 모습이다.
이 건물의 이름은 '앙가르 아 바난(Hangar à Bananes)', 바나나 창고란 뜻이다.
과거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실어온 바나나를 보관해 익히던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2007년 예술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②과자 공장→현대예술센터
낭트역에 도착하면 눈에 들어오는 흰색 탑을 봤을 때 성당인 줄 알았다.
낭트가 본점인, 아주 프랑스다운 비스킷 회사 '르페브르 위틸(LU)'이
1970년대에 현대식 공장을 지으면서 버린 옛 공장이었다.
과자 냄새를 풍기던 비스킷 공장 건물은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립현대예술센터로 변신했다.
건물은 물론, 과자 회사 머리글자까지 잘 보전해
센터 이름을 '르리외 유니크(LU·독특한 장소)'라고 지은 센스에 감탄했다.
외관상으론 예술센터라고 상상할 수 없었지만 안에 들어서자 천장이 시원하게 트인 극장이 눈에 들어왔다.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의 책을 소개하는 '아틀란디드' 책 축제가 한창이었다.
관광객들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 공장엔 낭트 예술학교와 예술가 스타트업들이 계속 입주하고 있다.
③물류 창고→전시장
낭트의 도시 재생을 이끈 주역인 장마르크 에로(Ayrault) 시장과 약속을 하자
'항가 32(32번지 창고)'라는 건물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낭트의 물류 창고로 쓰이던 건물은 택배 창고처럼 간결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시원한 전시 공간이 펼쳐졌다.
외국에서 낭트의 도시 재생을 배워가는 건 흔한 일이 됐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이스라엘과 노르웨이의 지자체들도 '공부'를 하러 왔다.
에로 시장은 말했다.
"오래된 공장 건물 같은 낭트의 산업 유산을 보존하는 일이 도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도시와 비슷비슷한, 그렇고 그런 재개발 사업이 추진된다면
누가 낭트를 찾아오겠습니까."
유학생 한승훈(35)씨는
"낭트에선 의견이 갈리는 사업을 해결할 때 강행이 아닌, 설득을 선택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1895년 지어진 '캡44'란 낡은 건물의 보존 사례가 대표적이다.
낙후된 외관 탓에 건물을 없애야 한다는 시민의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시는 보존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세계 최초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고려한 것이다.
여론조사, 설명회 등을 통해 시민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 과정만 10년이 넘게 걸렸다.
귀국 전에 낭트 거리를 거닐던 중
유명 설치미술가 다니엘 뷔렌(Buren)이 강가를 따라 설치한 '원 고리' 위에 걸터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시민과 꾸준히 소통하며 도시재생 철학을 고수한 낭트시의 작품 같았다.
언젠간 한국에서도 이런 작품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미탐100 다녀왔습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 우리도 우리만의 코끼리 만들어야"
문화와 예술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가꾸는 힘이 있다고 믿는 스물한 살 대학생입니다.
저는 가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데, 그때마다 아쉽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박물관에 박제(剝製)된 것일 뿐 도시와 시민들과는 철저히 구분돼 있어서죠.
프랑스 낭트를 탐험지로 정한 건 그 때문입니다.
낭트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고 시민들이 도시를 가꿔 나가는 문화의 주체라고 해서요.
실제 그랬습니다. 비결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도시 재생이었어요.
중앙정부가 결정하면 싹 밀어버리고 신식 건물을 재빠르게 올려대는 톱다운(top-down)식 재개발이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보텀업(bottom-up)식 도시 재생이
낭트를 유럽의 문화·예술 중심지로 재탄생시키고 있었습니다.
낭트 중심부의 높이 12m짜리 '르
그랑 엘레팡(Le Grand Elephant ·거대 코끼리)'은
옛 조선소의 고철과 폐목재(廢木材)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조형물을 보러 한 해 수백만 명이 낭트를 찾습니다.
우리도 우리 '코끼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도 함께 고민하겠습니다.
※ 청년 미래 탐험대 100 2차 탐험대원 지원 마감은 3월 17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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