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다음 해 태어난 조선인 발행 첫 민간신문
수많은 지하신문 비폭력 투쟁… 마침내 민족 신문으로 결실
일제강점기 문자보급 운동 폈듯 바른 보도로 여론 선도해야
돌이켜보면 언론은 역사에 자랑할 만한 두 번의 거족적 프레스 캠페인을 주도했다. 한말의 국채보상운동(1907~1908)과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 조선일보·동아일보가 함께 벌였던 문맹퇴치·문자보급운동이다. 두 운동은 특정 신문사 차원에서 단독으로 벌인 사업이 아니며, 비폭력 민족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3·1운동 이후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되는 기간에는 우리가 크게 주목하지 못했던 언론 투쟁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이 역시 하나의 매체가 아니며, 비폭력 투쟁이라는 앞의 두 캠페인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3·1운동 당일에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에 이은 수많은 지하신문의 항일투쟁이다. 일제는 강제합병 뒤 한말부터 조선인들이 발행하던 신문은 모두 폐간하고 조선어 신문은 매일신보 단 하나만 남겨두었다. 매일신보는 제호의 수난과 동시에 통감부 시절에 기관지로 창간된 '경성일보'에 통합되어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이 관장하는 일어 신문의 하부 기구로 전락하였다. 서재필의 독립신문(1896) 이래 민족언론의 전통은 완전히 숨통이 끊어졌다.
학자에 따라서는 1910년 총독부가 민족지를 모두 폐간시킨 때로부터 1920년 조선·동아가 창간되기까지 무단정치 기간 10년을 '무(無)신문기'로 규정한다. 유일한 한국어 신문 매일신보는 조선 민중의 전국에 걸친 독립운동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다가 3월 7일 자 1면 상단에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며 만세 운동 가담 학생과 일반인을 엄중 처벌할 것이라는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의 '유고(諭告)'를 실었다. 본문보다 한 호 더 큰 활자로 편집한 유고는 각지의 독립운동을 '소요사태'로 폄하하고 불령도배(不逞徒輩)의 선동으로 규정했다. 같은 날 3면에는 '각지 소요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서울과 지방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지하신문을 통해서 전국에 들불처럼 맹렬하게 확산되는 독립만세운동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일주일 후에야 처음 알린 것이다.
'조선독립신문'의 발행에 연루되어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73명에 달했다. 신문을 제작한 천도교 출판사인 보성사의 이종일을 비롯해 조선독립신문 사장 윤익선(尹益善·보성법률상업학교 교장) 등은 3년 내지 6개월간 복역하였다. 조선독립신문은 사장이 구속된 뒤에도 등사판으로 인쇄되어 뒤를 이었고, 제호를 달리한 여러 지하신문을 발행하다가 체포되어 실형이 선고된 관련자들이 줄을 이었다. 국내 각지와 해외에서 여러 종류의 소식지가 발행되는 동안 상하이에서는 인쇄 시설을 갖추어 8월 21일에 '독립신문'(사장 이광수)이 창간되었다. 총독부는 마침내 조선인들에게 제한된 숫자의 신문 발행을 허가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조선일보가 창간되었다.
조선일보는 창간 첫해에 두 차례 정간을 당하는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수감된 애국지사들을 따뜻한 눈길로 보도했다.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지면에 반영하면서 1920년대를 넘기고, 문자 보급과 같은 문화운동으로 전술과 방향을 바꾸면서 슬기롭게 역사의 거친 파도를 헤쳐왔
다. 조선일보 100주년이 내년으로 다가왔다. 주변 강국에 둘러싸여 언제나 불안한 지정학적 여건에서 남북 관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어느 때보다 위급한 현실에서 국내의 이념 갈등, 하강 국면에 처한 경제 문제 같은 난제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권력을 견제하고 바른 보도와 용기 있는 논평으로 여론을 선도할 조선일보의 역할은 더욱 막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