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코, 곱슬 수염...신라 무인석, 아라비아 상인 닮았죠
2019.03.05
[문인석과 무인석]
문인석은 문관, 무인석은 무관 조각…
무덤 앞에서 사악한 기운 쫓는 역할
아라비아 상인과 교역 엿볼 수 있어
독일에 있던 조선시대 문화재인 문인석 한 쌍이 3월 19일 우리나라로 돌아올 예정이래요.
이 문인석은 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박물관 소장품이었어요.
그런데 불법적 과정을 통해 소장품이 된 것으로 추정되자 로텐바움박물관이 자진 반환하기로 한 거예요.
바로 문인석의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묘에 있어야 할 물건이 왜 골동품점에?"
문인석은 문관 모습을 조각해놓은 상입니다.
◇"묘에 있어야 할 물건이 왜 골동품점에?"
문인석은 문관 모습을 조각해놓은 상입니다.
능(임금이나 왕후의 무덤)이나 묘 앞에 세워두려고 만든 것이에요.
무인 모습을 조각한 무인석과 함께 무덤을 지키는 상징적 역할을 하지요.
주로 문인석은 관복 차림에 검은 천으로 만든 관모인 복건을 쓰고
손에는 임금을 만날 때 드는 작은 판인 홀(笏)을 쥐고 있습니다.
무인석은 무인을 표현한 조각답게 갑옷을 입고 있으며 칼을 차거나 쥐고 있어요.
- ▲ /그림=안병현
문인석과 무인석 같은 석물(石物·능묘 주변에 설치한 돌로 만든 여러 가지 조각)은 단지 장식용은 아니었어요. 신성한 조상님 무덤에 사악한 기운이 침입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뜻이 있었죠.
1659년에 작성한 효종 임금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보면
'1000년을 지키고 있을 석물을 설치해 놓았으니 영원토록 온갖 혼령을 꾸짖으면서 보호하리라'고 쓰여 있죠.
묘를 지키고 서 있어야 하는 문인석이 정상적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 가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죠.
묘를 지키고 서 있어야 하는 문인석이 정상적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 가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죠.
독일 로텐바움박물관은 이런 의미를 모르는 채로 1987년 문인석 한 쌍을 사들였습니다.
물건을 판 독일인은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사온 거라고 말했대요.
로텐바움박물관은 정상적 방법으로 구한 게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고 반환하기로 한 거죠.
◇무인석은 왕릉에만 세울 수 있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무덤을 보호하고 무덤에 묻힌 사람을 경배하는 형태여서
◇무인석은 왕릉에만 세울 수 있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무덤을 보호하고 무덤에 묻힌 사람을 경배하는 형태여서
무덤에 묻힌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주기도 하지요.
특히 조선시대에는 문인석을 많이 세웠는데
각종 문헌 자료에 석인(石人)이라고 표현한 것은 대부분 문인석을 의미한다고 해요.
조선시대에는 왕 말고는 아무리 권력이 높다 하더라도 개인이 군사를 따로 둘 수 없었어요.
국가에서 무신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왕뿐이어서
왕릉 말고는 함부로 무인석을 세울 수 없었다는 설이 나왔죠.
다만 김장생이 정리한 '가례집람'이란 책에는 1~2품관의 무관도 무인석을 세우는 것으로 나오며,
반란을 진압한 공신 무덤이나 사대부 문중 묘에도 무인석이 세워지기도 했어요.
◇괘릉의 무인석상은 아라비아인이 모델?
이런 무인석과 문인석 같은 조각상을 능묘 앞에 세우는 것은 중국 한나라 때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괘릉의 무인석상은 아라비아인이 모델?
이런 무인석과 문인석 같은 조각상을 능묘 앞에 세우는 것은 중국 한나라 때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때 중국 당나라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무덤 앞에 조각상을 세운 것으로 보고 있어요.
12지신상, 문인석과 무인석, 사자석, 상석과 망주석, 비석 등을 석물로 세워며 무덤 모습을 갖추었는데
이런 모습과 배치가 왕릉의 본보기가 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졌지요.
통일신라 때의 여러 능묘 중 경주에 있는 괘릉은
통일신라 때의 여러 능묘 중 경주에 있는 괘릉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도 완벽한 구조를 갖춘 무덤으로 꼽힙니다.
봉분의 밑 둘레에 12지신상, 봉분과 멀리 떨어진 남쪽 정면에 돌사자 두 쌍과 문인석, 무인석 각 한 쌍이
석물로 세워져 있죠.
괘릉 무인석상은 독특한 모습으로도 유명합니다.
괘릉 무인석상은 독특한 모습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무인석은 키가(높이) 약 257㎝ 되는 큰 체구에 골이 깊게 파인 눈자위, 높은 코, 곱슬곱슬한 수염을
하고 있어요. 그 모습이 서역인(아라비아 사람)처럼 생겼죠.
신라가 아라비아 상인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증거로 보는 의견이 많아요.
[괘릉, 신라 제 38대 원성왕의 능]
괘릉은 누구의 무덤일까요? 괘릉은 작은 연못을 메우고 만들었어요.
[괘릉, 신라 제 38대 원성왕의 능]
괘릉은 누구의 무덤일까요? 괘릉은 작은 연못을 메우고 만들었어요.
능의 내부 시신을 모셔두는 방에 물이 고여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놓아
걸 괘(掛)자를 능 이름에 붙여 괘릉이라 불렸다고 해요.
'삼국유사'에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지금의 괘릉 인근에 숭복사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제38대 왕인 원성왕의 능으로 보고 있어요.
원성왕은 새로운 관리 선발 제도인 독서삼품과를 실시하고 벽골제를 넓혀서 짓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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