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화려한 삶 버리고 불꽃처럼 살아간 절개, 김염(金焰) (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조선일보)

colorprom 2019. 1. 11. 16:30

역사 속 숨은 영웅

화려한 삶 버리고 불꽃처럼 살아간 절개, 김염(金焰)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독립운동 전면에 나선 사람들 외에 사회·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영웅이 있었다.


  • 구성 및 제작= 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입력 : 2016.07.25 08:31 | 수정 : 2016.07.25 15:52

1930년대에 중국에서 활동한 영화배우로 '영화 황제'라 불렸다. 주요 작품은 '도화읍혈기(桃花泣血記)', '야초한화(野草閑花)', '대로(大路)','장지릉운(壯志凌云)' 등 다수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항일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선언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국가 일급배우로 임명되었으나, 정의와 자유에 대한 절개를 지키며 공산당원이 되기를 거부했고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에 수용소에 끌려갔다. 이후 극심한 노동에 병까지 얻어 투병생활을 이어가다가 73세의 나이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김염,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김염. 본명은 김덕린. 그는 1910년 4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나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한 두 살 무렵 중국으로 건너갔다. 김덕린의 아버지 김필순은 의사였는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일제가 자신을 신민회 사건에 연루시켜 체포하러 올 것을 알아차리고는 가족들과 서간도로 몸을 피했다.

서간도에 정착한 후에도 김덕린의 아버지는 의사로 일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덕린이 열 살 될 무렵, 아버지는 차가운 시신이 되어 가족에게 돌아왔다. 사인(死因)은 독살이었다. 할머니, 어머니, 두 명의 형과 네 명의 동생, 그리고 김덕린까지 아홉 식구의 생계는 순식간에 막막해졌다. 아버지가 돈을 벌면 남김없이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놓았기에 집안에 남아 있는 돈은 없었다.

결국, 식구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덕린이 맡겨진 곳은 상하이(상해·上海)에 있는 둘째 고모 댁이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가 그의 고모부였다. 김규식이 톈진(天津)의 한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덕린은 학창 시절을 톈진에서 보냈다. 고모부가 교수로 재직했지만 가난은 여전했다. 덕린은 학교 일을 도와 용돈 벌이를 하면서 공부했다.

** 김염(김덕린)의 아버지 김필순은 안창호, 김구,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의 핵심인물로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한인 독립운동기지를 만드는 등 항일 투쟁운동을 해나갔다. 김염은 어린 시절에 상해애국부인회를 조직한 독립운동가인 고모 김순애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했는데, 그 고모부가 바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대한독립을 세계에 널리 알린 김규식이다. 또 다른 고모부인 서병호 역시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의원이었으며, 한인청년당을 창당한 서재현과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이자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진 김마리아는 그의 사촌들이다. 그 밖에도 김덕홍, 김위, 김로 등 김염의 형제자매들도 대부분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영화배우의 꿈을 꾸었던 덕린은 결국, 열일곱 살 때 친구들이 마련해준 차비로 상하이행 기차를 탔다. 불꽃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자며 예명도 '염(焰)'으로 바꿨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염은 영화사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일했다. 낮에는 검표원이나 문지기로 일했고 밤에는 극장 한구석의 긴 걸상에서 잠을 잤지만, 마음속에 품은 영화배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사진을 잘 받는 균형 잡힌 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연기…
이 작품으로 김염은 새로운 타입의
남자 배우로서 단숨에 1930년대의
영화 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쑨위 감독
'동양의 파리'였던 격동의 상하이, 신드롬을 일으키다
1927년, 가난한 영화배우 지망생으로 중국 영화계에 뛰어든 김염은 영화사의 업무보조, 엑스트라, 단역 등 무명시절을 보내다가 희곡작가 톈한(田漢)과 쑨위(孫瑜) 감독과의 인연으로 인생이 달라졌다. 당대 중국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쑨위 감독은 다른 배우들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청년상을 김염에게서 발견했고, 1929년 자신의 첫 번째 영화 '풍류검객(風流劍客)'에 김염을 캐스팅했다. 영화는 기대만큼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쑨위는 이듬해 두 번째 영화 '야초한화(野草閒花)'에서도 김염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영화 '야초한화'에 롼링위(阮玲玉)와 호흡을 맞춘 김염(왼쪽), 영화 '대로'에 출연한 김염 /영화 장면 캡처

중국영화는 홍콩을 망라하여
뿌리가 1930년대의 상하이에 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영화 황제
김염이 서 있었다.

영화 '야초한화'가 당대의 히트작이 되면서 주인공이었던 김염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영화는 부모들이 계획한 정략결혼에 불만을 품은 부잣집 청년이 봉건사회의 계급 질서를 뛰어넘어 거리에서 꽃을 파는 처녀를 사랑한다는 내용을 담은 흔한 멜로드라마였다. 하지만 문벌을 중시하는 봉건사회에 항의하며 자유롭게 자신의 미래를 열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김염은 이때부터 약 5~6년 동안 20편이 넘는 영화를 찍었고 그중 많은 영화가 크게 성공했다. 중국 어디를 가나 배우 '진옌'(김염의 중국 이름)을 알아보고 열렬하게 환호했고, 그의 사진을 사려는 젊은이들이 개봉관 앞에 장사진을 쳤다.

1934년, 그는 중국인들에게 '영화 황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화잡지 '전성(電聲)'에서 인기 투표를 실시했는데 가장 잘생긴 남자 배우, 가장 친구가 되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 있는 배우라는 세 개의 부문에서 김염이 모두 1위를 했다.

젊은 시절 김염의 모습들 /조선일보 DB

김염이 출연한 영화 '들장미'가 개봉되던 1932년 4월, 일본은 상하이 사변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홍커우(홍구·虹口) 공원에서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를 계획했다. 윤봉길 의사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천장절 행사장에 잠입해 준비해간 폭탄을 터뜨렸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인을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시선을 바꿔놓았다. 때마침 노골적인 일본의 중국 침략에도 미온하게 대응하던 국민당 정부에 대해 중국인들이 분노하고 있을 때였다.

중국 영화계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박수를 보내면서 국민의 항일 의식을 고취시킬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34년 쑨위 감독은 '대로(大路)'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여기서 주인공인 청년 노동자역을 맡은 김염의 연기는 중국 젊은이들의 가슴을 항일 의식으로 불타오르게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상하이에서 김염은 영화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김염은 '자신의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하도록 힘써야 하고,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힘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조선광복단체에서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찾아오면
셋째 오빠는 흔쾌히 돈을 내주었다." - 김염의 동생 김로

한편, 김염은 중국 영화계의 총아로 군림하던 시절부터 남몰래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오고 있었다. 1935년에 김염은 바쁜 촬영 일정에도 비밀리에 난징(남경·南京)으로 향해 백범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했다. 이후에도 김구 등과 수차례 만남을 가가지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김염은 항일 영화인의
삶을 선언하는데… 그 배경에는
독립운동가 아버지가 있었다

시대정신을 담은 배역 맡고,
결코 상업영화에는 출연 안해…

성공의 정점에서 김염은 진보적 항일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선언했다. 그가 주로 맡은 배역들은 대부분 당대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대로'의 청년 노동자 역 외에도 '일전매(一剪梅)'에서는 의적이 되는 경비대장 역을 맡았고, '장지릉운(壯志凌云)'에서는 도적을 물리치는 청년 지도자, 중년이 되어 찍은 '폭풍 속의 매'에서는 홍군과 힘을 합쳐 마을을 지키는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그가 연기했던 영화들이 다루었던 커다란 주제는 사회 변혁, 정의, 항일 등이었다.

김염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언제나 고뇌하며 살았다. 그는 수많은 여성 팬을 몰고 다닌 매력적인 배우였지만, 결코 상업적인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이들이 호감을 표했다.

영화 '대로' /영화 캡쳐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일본의 제국주의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

김염

장관 보다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영화사들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 김염은 직접 항일 운동에 투신할 생각으로 공군 조종사가 되려고 시험을 봤지만 낙방했다. 그러던 와중에 중일 합작 영화에 출연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배우는 부자들의 심심풀이 노리개가 아니다. 자기의 예술이 사회에 유용하도록 힘써야 한다"며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은 그는 부인과 홍콩으로 도피해 7~8년간 방랑 생활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지만 중국 안에서 또다른 전쟁의 포성이 울렸다.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와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이 국공 합작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이는 다시 대륙을 전쟁의 시대로 몰고 갔다. 중국공산당이 승리해 장제스는 1949년 대만으로 내몰려 새로운 정부를 세웠고, 마오쩌둥은 그해 10월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천명했다.

이렇게 역사가 역변하고 김염의 사회적 위치도 달라졌다. 그간 중국영화에 기여한 공로로 일급배우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장관보다 더 높은 지위였다. 동시에 상하이 영화제작소의 극단장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영화인, 예술가, 명망을 얻은 지식인들은 모두 공산당을 지지했고 마오쩌둥이 열어갈 새로운 중국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 후에 재혼한 두 번째 아내 또한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다.)

변하지 않는 신념을 지키다 맞은 시련의 세월
하지만 김염은 공산당원이 되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당에 들어오기를 권유했을 때에도 그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김염은 자유인이길 소망했고,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을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중년의 김염은 왕이 감독의 '폭풍 속의 매'(1957년)에 출연했다. 청년들과 마을 사람들이 단합해 마을 사람들을 착취하는 이들을 몰아낸다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품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배우 김염, 인간 김염의 주제는 '정의'와 '자유'였고 그에게 있어서 영화는 불의와 싸우는 무기였다.

마오쩌둥의 국가 재건 운동인 '대약진운동' 이후, 또다시 펼쳐진 혁신운동 '문화대혁명'의 바람이 불면서 김염은 위기를 맞았다. 마오쩌둥의 부인이자 김염과 함께 당대에 활약했던 배우 장칭(江靑)은 김염을 '커피와 버터를 좋아한 반혁명 양파분자'라며 철저히 매도했다.

결국, 김염과 아내는 상하이 교외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가 노동을 해야 했다. 이때 김염은 병을 얻게 되었고 아내는 4년 동안 독방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으며, 그 충격으로 아들은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혁명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도 김염은 투병생활을 이어가다가 1983년 12월 27일, 7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추도식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넋을 기렸다. 현재 김염의 유골은 상하이 용화열사능원(龍華烈士陵園)에 모셔져 있다.
[김병조의 화첩기행] 김염과 상하이 (1)
[김병조의 화첩기행] 김염과 상하이 (2)

(참고=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3, KBS '한국사 傳')

김염, 항일 영화인으로서의 삶


김염, 후대의 이야기

중국 영화 100년사에서 유일하게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배우

작은 외조부의 흔적 좇아 중국행, 책 출간한 외손녀
모든 이야기는 20여년 전 어느 날 박규원(62)씨가 어머니의 오래된 앨범 속에서 찾아낸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다. 사진 속 낯선 남자는 송중기나 김수현보다 앞서 중국을 휩쓸었던 한국인 배우 김염. 그의 작은 외조부이자,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둘째 아들로 1930년대 중국 상하이를 무대로 활동한 당대의 스타였다. 박씨는 어머니에게 '중국 아저씨'가 있다는 것은 듣고 자랐지만, 그가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까지 불린 명배우라는 것은 몰랐다. "중국이 '중공'으로 불렸던 시절, 중국 문화계의 고위급 인물이 집안 어른이라는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박규원씨가 지난 2016년 5월 3일 서울 방이동 자택에서 김염과 '올드 상하이'를 알게 해준 가족들의 낡은 사진첩을 펼쳐 놓고 자신의 외조부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평범한 주부였던 박씨는 무엇엔가 홀린 듯 그에게 빠져들었다. 님 웨일즈(Nym Wales)가 "그의 아름다운 육체 너머로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았다"고 했던 청년 배우의 행적을 뒤좇아 '돗자리와 양산' 하나 들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여서 걷다가 힘들면 앉아 쉬어야 했기 때문에 돗자리는 필수품이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박씨는 김염의 일대기를 그린 '상하이 올드데이즈'로 민음사 주최 2003년 논픽션 공모에서 대상(大賞)을 받는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민족의 불행한 시대와 개인의 갈등 구조를 시점과 인칭을 오가며 절묘하게 그렸다"고 평했다.

김염의 부인이자 중국 최고위급 배우 친이(秦怡·94), 극작가 선지(沈寂·92) 등 상하이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옛 이야기는 그 어느 영화보다 극적이었다. 어머니가 만주 용정에서 살던 시절, 온 가족이 김염이 나온 항일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가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됐다. 그런데 그날 영화를 보러 갔던 사람들은 일본군에 몰살당하는 기막힌 일을 겪기도 했다. 그는 "내가 들은 이야기는 영화 '암살'이나 '색, 계'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며 "중국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1930년대 상하이, 영화 '암살' '색, 계'보다 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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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혁(bhj****)2017.03.0516:34:14신고

광산 김씨 문숙공파 후손으로,
김환식 전 총리 집안의 인물로 어려운 이시기에 다 같이 본받아야 할 인물.
호연 리(hy8****)2016.07.2702:36:28신고
독립항일운동하신 분들은 모두
개인의 전부와 최선을 다하신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고 제일사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한가지가 아쉽다면 한반도 자기 땅에서는 항쟁을 얼마못하고
만주 시베리아 중국에서 해야만 했다는 슬픔을 갖고 희생하셨다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박영규(3927****)2016.07.2518:15:41신고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본 받아 나라와 민족을 지켜야 한다.
이헌용(hylee****)2016.07.2517:36:31신고
지금보다 몇 십배 어려운 환경에서 그 토록 자존을 지키며 민족의 힘을 안고 의연하게 자기의 길을 간 진정한 영웅
우리는 이런 분들을 교과서에도 싣고 그 자손들이라도 잘 지원하며
자라나는 후손들의 귀감을 삼아야 한다고 본다.
정말 진정한 영웅을 뵌 느낌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이종용(cale****)2016.07.2516:19:31신고
놀랍고 흥분되고 자긍심도 느낀다...그 이름 우리의 영원한 영웅 김염!
체계적으로 학술적으로 발굴하여 영웅을 모시고 대접하자!

"송중기에 대한 책 쓰고 싶다" 작가 박규원씨

             
입력 2016.08.23 10:59

올해 배우 송중기에게 ‘빠진’ 여성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작가 박규원(62)씨가 느낀 감정은 특별하다. 박씨는 작은 외조부이자,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원조 한류스타 김염(金焰·1910~1983)에 대한 책을 써 2003년 민음사 주최 ‘논픽션 대상’을 받은 인물. 그는 “송중기의 연기와 목소리를 보고 김염을 보았을 때처럼 어떤 사명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20년 전 어느 날, 박씨가 ‘중국 아저씨’로만 알았던 김염의 사진을 보게 된 것이 시작이다. 김염은 항일영화 ‘대로’ 등 40여편의 중국 영화에 출연한 1930년대 최고의 배우다. 박씨는 무엇엔가 홀린 듯 김염에게 빠져들어 무작정 중국으로 떠나 그의 흔적을 좇았다. 몇 년 뒤 박씨가 펴낸 ‘상하이 올드데이즈’에 대해 당시 심사위원들은 “민족의 불행한 시대와 개인의 갈등 구조를 시점과 인칭을 오가며 절묘하게 그렸다”고 평했다.

박규원씨가 서울 방이동 자택에서 김염과올드 상하이를 알게 해준
가족들의 낡은 사진첩을 펼쳐 보이고 있다.

박씨가 김염의 이야기를 쓰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중국의 극작가 선지(沈寂)였다. 선지는 박씨를 처음 만났을 때 ‘김염의 외손녀는 나의 외손녀’라며 환대했다고 한다. 김염의 영화를 보고 자라난 선지는 10여년간 박씨에게 김염과 상하이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다. 상하이는 1935년에 인구 350만 명의 대도시였고, “황금이 땅에 깔리고 기회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세계”였다. 박씨는 올해 5월, 김염이 목숨처럼 사랑했던 올드 상하이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특별한 올드 상하이’(프리이코노미 라이프)로 펴냈다. 그 증인이었던 92세의 선지는 박씨의 두 번째 책을 받아보고 누구보다 반가워했지만,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올 여름, 선지의 타계로 상실감에 빠져 있던 박씨는 TV 드라마에서 송중기의 연기를 보고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과거 중국 배우 김염을 한국에 소개했듯이, 한국 배우 송중기를 중국에 소개하는 책을 쓰는 것이다. “연기를 통해 시청자에게 다가오는 마음의 절절함과 집중력, 유쾌함을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써서 중국에 알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씨 가 한국 배우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선지의 바람이기도 했다.

박씨는 선지가 생전 “내가 김염에 대해 보고 느낀 것을 역사에 기록했듯이, 네가 한국의 배우에 대한 책을 써서 중국에 알리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는 “송중기 측의 허락도 받아야 해서 실현될 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선지)의 유언이기도 한 만큼 꼭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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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23/2016082301039.html


고세호(ela*)2016.08.2311:57:52신고

중국 전자제품 브랜드의 최고 성가를 올리는 모델이 송중기....
송중기 광고판이 삼성전자 광고판을 밀어내고 있다는 기사가 다시 떠오른다는....
송중기가 잘나간다고 해도 자국 브랜드를 밀어내는 첨병에 섰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듯...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23/20160823010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