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

[148]1543-1(1)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박종인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9. 1. 2. 18:16

1543-1[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기 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조선일보
                             
             
입력 2019.01.02 03:39 | 수정 2019.01.02 03:40

[148]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1] 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15세기 유럽대항해의 시대였다.

스페인포르투갈이 경쟁적으로 동서로 배를 띄워 무역로를 개척했다.

동아시아에서는 1405년 무슬림 환관 정화가 이끈 명나라 함대가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세계는 연결되고 있었다.

16세기가 왔다. 1000년 유럽 지성사를 억누르던 천동설이 폐기됐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적 탐구와 탐험의 시대가 도래했다.

동아시아의 끝, 일본에 마침내 유럽인이 상륙했다.

일본은 그들로부터 철포(鐵砲)를 손에 넣었다.


지구는 고속으로 돌고 있었다.

그 지구 위에서 조선은 성리학 교육기관이자 사대부 정치의 본산, 서원을 설립했다.

이 모든 일이 같은 해 몇 달 차이로 벌어졌으니, 서기 1543이다.

이후 20세기까지 유럽, 일본과 조선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알아야 할,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


지구가 움직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543 3월 25일 유럽 발트해에 맞닿아 있는 폴란드 북쪽 작은 도시 프롬보르크에서,

프롬보르크 성당 사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해 전 겨울 뇌출혈로 오른쪽 몸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의 제자 예르지 레티크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출판한 논문이 프롬보르크에 배달됐다.

제목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다.

저자는 코페르니쿠스 자신이다. 몇 년을 망설이며 미루다 발표한 논문이었다.

라틴어로 쓴 논문 서문에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썼다.

'그들이 아무리 제 연구에 대해 비난하고 트집을 잡더라도 저는 개의치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무모한 비판을 경멸할 것입니다.'


비난을 예상하고도 그가 내뱉은 주장은 '지구는 돈다'였다.

이미 의식을 잃은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논문을 보지 못했다.

5월 25일 코페르니쿠스가 죽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가 봉직하던 성당 안에 묻혔다.

지구가 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中世) 1000년 동안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주장이었다.

저자가 죽고 73년이 지난 1616년 논문은 교황청 금서(禁書) 목록에 올랐다.

불과 4년 뒤 논문은 금서에서 해제됐다.

그리고 1839년 2월 19일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폴란드 토룬 시청 앞 광장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건립됐다. 동상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Terrae Motor Solis Caeli Que Stator'. 독일 과학자 알렉산더 훔볼트(1769~1859)가 썼다.

뜻은 이러했다. '지구를 움직이고 태양과 하늘을 멈춘 사람'.


바티칸은, 세상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인간은 신에 속박되지 않았다.

지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달 뒤 일본, 철포를 구입하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코페르니쿠스가 논문을 발표하고 정확하게 다섯 달, 그가 죽고 석 달 뒤

명나라 상선 한 척이 일본에 도착했다. 1543 8월 25일이다.

일본 가고시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種子島)라는 작은 섬이었다.

선장 이름은 명나라 사람 오봉(五峯)이고, 100명이 넘는 선원은 모두 외모가 기이했고 말도 달랐다.

오봉은 이들이 '서남만인(西南蠻人)'이라고 했다. 동남아시아보다 더 서쪽, 유럽에서 왔다는 뜻이다.

다네가시마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호기심을 보였다. 도키타카는 열다섯 살이었다.

포르투갈 사람 프란시스코 지모로크리스토 페로타가 속이 뚫린 두세 척(尺)짜리 막대기를 보여줬다.

술잔을 멀찍이 바위에 놓고 막대기 끝에 불을 붙이니 번개 같은 빛과 천둥소리가 터지며 술잔이 박살났다.

은산(銀山)도 부수고 철벽(鐵壁)에 구멍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도주 도키타카는 거금을 주고 철포 2자루를 샀다.

한 자루는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八板金兵衛)가 역설계해 1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했다.

한 자루는 당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 헌상했다.

또 1년 뒤 도주 도키타카는 오사카에서 온 상인에게 철포 제조법을 공개했다.

철포는 삽시간에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555 음력 5월 21일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총통(銃筒) 한 자루를 들고 부산으로 와

귀화를 요청했다. 그 정교함과 파괴력을 본 대신들이 "낡은 종을 녹여 총통을 제작하자"고 왕에게 건의했다.

13대 조선 국왕 명종은 "옛 물건은 신령한 힘이 있다"며 거부했다.


1589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가 조선 정부에 조총(鳥銃)을 헌상했다.

정부는 무기고에 조총을 집어넣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590 철포로 무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일본을 통일했다.


1592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아들 히사토키(久時)도 참전했다.


지구는 격렬하게 회전 중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나라'가 되다

주세붕
주세붕

유럽에서 신의 권위가 추락하고 이웃 일본은 그 세상과 접촉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날짜는 기록에 없다.

조선 영주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서원(書院)을 세웠다.

성리학 성현을 제사하는 사당이며 선비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라고 했다.

이름은 송나라 주희(朱熹)가 세운 백록동서원 이름을 따서 백운동서원이라 했다.

부임한 지 2년째, 흉년이 내리 3년 지속되던 날이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학교가 있는데 어찌 서원을 세울 필요가 있으며, 흉년을 당하였으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주세붕이 이리 대답했다.

"주자백록동서원을 세울 때는 금나라가 중국을 함락하여 천하가 피비린내로 가득하였고

남강 땅은 큰 흉년으로 벼슬을 팔아 곡식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위태로움과 곤궁함이 그토록 심하였는데도 그가 세운 서원과 사당이 한둘이 아니었다.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하다."

이후 조선성리학(性理學)조선이 되었다. 주자(朱子)조선이 되었다.

성리학은 나날이 발전하여 조선 정신문화는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대신 주자성리학에 반하는 학문은 암흑기를 맞았다.

자기 발로 걸어온 철포를 팽개쳤고 예고된 전쟁에 손을 놓았다.

하늘이어야 할 백성의 경제활동을 탐욕이라고 규정하며 상업과 공업을 억압하고

조선 팔도에 널린 금·은광을 폐쇄했다.

대신 중국을 하늘로 섬겼다.

세계사 연표
'왜놈' 일본조선에서 도입한 은 제련법으로 세계 2위 은 생산국이 되었다.
유럽 학문을 수용해 강병을 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지구는 전속력으로 광대무변한 우주를 날아갔다.
유럽도, 일본도 목적지는 부국강병이었다.
그 흔적은 지구 곳곳에 남아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2/2019010200338.html




유재운(yjwo****)2019.01.0216:31:40신고
대항해가 시작된 것도 인간의 고상한 이상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되었죠.
르네상스도 부를 쫒아 피렌체로 모여든 예술가와 학자 그리고 그들을 지원한 부유한 상인 메디치 덕분이었고요.
일본을 개화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것도
일본에 은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인들 덕분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을 이익을 쫒는 존재죠.
그래서 심지어 묵자는 이익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했죠.
그러나 우리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선비는 이익을 쫒지 않는다는 명분하에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도 선비는 천한 육체적 노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상인이 가장 천한 직종이었고요.
그 차이가 우리의 근대사를 치욕의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DNA는 여전히 우성인자로 남아있습니다.
북한은 이익을 자본주의의 썩은 물이라 여기고 중산층이 생기자 화폐개혁으로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남한은 기업이 공공의 적으로 내몰려 결국 이익공유제라는 고상한(?)법이 생깁니다.
변재광(lonesta****)2019.01.0213:17:00신고
우리와 일본은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매우 다른 선택을 합니다.
19세기 중엽 앞바다에 미국 기선이 나타났을때
일본은 재빨리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불태워 없애 버리고 척화비를 세우고 우쭐 했지요.
바로 그런 차이가 후일 일본은 미국에 맞서는 열강의 한나라가 되고
우리는 이리저리 동네북 신세로 전락합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되어 미국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일본은 미일동맹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떠오르는 중국을 제어하는데는 미국의힘을 이용하는것이 더욱 현명한 전략이겠지요.
우리는 아직 상대하기 버거운 적들에 둘러쌓여 있는데도 실속없는 전작권 환수에 목을 매고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훌륭한 선택이었는지 우리 후손이 그 역사적 결과를 감당하게 되겠지요.
김용연(ze****)2019.01.0212:40:13신고
화포(천자총통 등)와 화약 등의 제조, 운용기술이 어려운 시절에도 전수된 것이
임진왜란 등 국난을 이긴 큰 바탕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소총의 제조술까지 받아 들였다면 역사는 바뀌었겠지요.
김일용(i****)2019.01.0211:40:42신고
글 서두에 15세기가 유럽의 대항해시대였다는 문장을 보고
"유럽은 16세기라고 봐야지. 명나라의 정화가 15세기이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5세기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것이 1492년이었고,
이후 아메리고베스푸치, 바스코다가마, 마젤란 등이 새로운 항로를 열였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대항해시대는 16세기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사견).
하지만 명나라의 정화는 1405년부터 대항해를 시작했으니 15세기라고 말하기에 떳떳합니다.
하지만 스페인 포르투갈과는 달리 명나라의 대항해는 중단되고 말았기에
역사를 크게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최근에 본 이춘근 박사의 유튜브 동영상에 따르면 1500년 당시 명나라는 세계 최강국으로
세계 전체 GDP의 1/3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종자도 도주가 15세였는데 총 2자루를 구입했다니 놀랍습니다.
도주가 15세였다면 세습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 그렇군요. 15세기 포르투갈에 Prince Henry the Navigator란 위인이 있었군요.
몰랐던 것 하나 배웠습니다. You deserve to be honored as a specialist in Travel and Culture.
          박종인(sen*)2019.01.0212:14:53신고
포르투갈은 15세기 초부터 대서양으로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진출은 15세기 말이고요.
선생님 의견 크게 참고하겠습니다.
          김일용(i****2019.01.0211:57:27신고
제가 말씀드린 것은 오류 차원이 아닙니다. 좀 무리가 있다는 정도이지요.

          박종인(sen*2019.01.0211:55:13신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류는 계속 수정하겠습니다. 박종인 올림
김일용(i****)2019.01.0211:31:01신고
박종인 기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신년이 밝자마자 발표한 첫 글이 매우 신선합니다.
이와 관련된 부분 적인 글은 많았지만 이렇게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글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12편의 글 시리즈 제목까지 다 정해 놨다는 것은
이미 스토리 전개는 물론 내용의 얼개가 다 짜여졌다는 것인데 정말 대단하군요.
조선의 역사를 다루는 것보다 이 글처럼 세계역사 속의 조선을 들여다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유익한 것 같습니다.
정보가 넘치는 이런 글은 도중에 하나 둘 오류가 나오기 마련인데
박종인 기자님의 글을 보면 오류를 찾기가 힘듭니다.
대단히 공을 많이 들인 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리즈 글이 기대됩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2/20190102003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