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을사조약과 군함 양무호
제국, 군함을 도입하다
1903년 1월 25일 대한제국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군함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군함 이름은 훗날 양무호(揚武號)라고 지었다.
석 달 만인 4월 15일 양무호가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했다.
규모는 3000t이 넘었고 배에는 80㎜ 대포 4문과 소포 2문이 장착돼 있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호시탐탐 대한제국을 노리던 때이니 군비 증강은 필연이었다.
그해 7월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이 황제 고종에게 상소했다.
"당당한 우리 대한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도 해군 한 명, 군함 한 척이 없어
오랫동안 이웃 나라의 한심스럽다는 빈축을 사고 있으니 이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1903년 7월 29일 '고종실록')
16세기 말 이순신이 만든 조선 해군을 부활시키자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여론이 이상했다.
'시국을 볼작시면 시급한 일을 정리하지 않아 위급하게 되었으니
군함 같은 일은 때를 기다려도 늦지 않으리라.'(1907년 6월 1일 '황성신문', '군함 사건을 논함')
황현이 쓴 '매천야록'을 본다.
'고물인 데다가 누수까지 되어 빨리 항해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인을 고용하여 수선 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전후에 걸쳐 거액의 비용이 소모되었다
(又敗漏不可駛 雇倭補苴 前後費巨額).'('매천야록', '1903년 일본군함 양무호 구입')
쓸데없는 고물선을 샀다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군함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며칠 뒤 황성신문 기자가 배에 올랐다.
'명품으로 치장한 군함'
다음은 1903년 1월 25일 군부대신 신기선과
'군기(軍器)는 적당히 완비할 일'
'융통해서 쓰려는(變通)' 목적이었으니 대한제국 정부는 이 배가 신품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미려한 서양 요리 기구'와 '화려한 침구'가 조건이었으니 군사 전용선을 주문한 것도 아니었다.
무기는 '적당히' 완비하고 예포용 공포탄 또한 적당히 두라 했으니 더욱 엉성했다.
양무호 가격은 '일화(日貨) 55만엔', 110만원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군부(軍部) 예산은 세출 기준으로 412만3582원이었다.
한 해 국방예산 26.7%를 투입한 배가 군함으로 봐줄 수 없는 것이었다.
중고라는 사실을 알면서 써 재낀 돈이 그러했다.
오직 황제 기념식을 위하여
지금이라면 방산 비리로 줄줄이 사법 조치될 일이었으나 만사형통으로 넘어간 이유가 있었으니,
명세서 둘째 항목에 세 줄로 적혀 있는 조건 덕분이다.
'접객실을 특설하여 대한국 황실 경절 때 봉축에 공할 일.'
당시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은 이렇게 기록했다.
'1903년 1월 군부대신 신기선이
약 55만원(엔) 상당 전함(戰艦)을 일본으로부터 구입하는 발주 계약을 체결함.
이는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위해 발주한 것임.'(호러스 알렌, '근대한국외교사연표', 1904년)
때는 1903년, 고종이 나이 열한 살에 조선 26대 왕에 등극한 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만 쉰한 살이 된 망육순(望六旬) 해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만방에 알리고 문명국가임을 자랑하려는 칭경예식 행사가
곳곳에 예정돼 있었다.
해군과 무관했다. 자주국방과도 무관했다.
군부대신이 주장한 '삼면이 바다인 당당한 제국'과도 무관했다.
오로지 40주년을 맞은 고종 황제 폐하 등극 기념식에 황제를 선상에 앉혀놓고 예포 몇 방 쏘려는 게
상고물 양무호를 수입한 이유였다.
기왕에 거액으로 구입한 배이니 기념식에라도 썼다면 다행이었으되,
'군함 양무호'는 그 어느 바다에도 떠다닌 적이 없었다.
대신 양무호는 가난한 대한제국 곳간을 바닥까지 싹싹 훑어내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군복은 외제(外製)로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선포됐다.
사흘 뒤 탁지부대신 박정양이 의정부찬정 심순택에게 5만원 지급 요청 업무 연락을 띄웠다.
'(즉위식) 제반 비용을 결제해야 하는데, 금고가 텅 비었으니 이 어찌 군색하지 않으리오.'
이보다 열흘 전 박정양이 보낸 또 다른 업무 연락 제목은
'황제 도장(御寶) 제작용 황금 1000냥 구매 요청'이었다. 비용은 4만5000원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세출 예산 419만427원 가운데 52만원이 국채(國債)였다.
한번 솟구친 허세는 꺾일 줄 몰랐다.
고종은 군복에 쓸 철모를 독일 세창양행을 통해 수입했다.
대한제국은 이 철모를 대량으로 주문했다.(1899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하인리히 왕자 증언, 이경미,
'사진에 나타난 대한제국기 황제의 군복형 양복에 대한 연구' 재인용)
1900년 육군참장 백성기가 이렇게 상소했다.
"우리나라 군복을 꼭 외국에서 사와야 하겠는가?"(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3년 뒤 군부대신 신기선이 상소를 올렸다.
"육군 장교 군복 옷감을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은 장구한 미래를 위한 계책이 아니다."
(1903년 1월 18일 '승정원일기')
1903년 대한제국 세입 예산은 1076만6115원이었다.
이 가운데 98만8250원이 그해 갚아야 할 빚이었다.
1903년 여름 콜레라가 창궐했다. 10월로 예정된 40주년 기념식은 이듬해 4월로 연기됐다.
1904년 4월 고종 막내아들 이은이 천연두에 걸렸다. 기념식은 무기 연기됐다가 취소됐다.
미쓰이물산은 제물포에 정박해 있는 양무호의 관리비와 원금, 이자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경비가 고갈되고 연례적인 지출도 걱정인데 긴요하게 쓸 것도 아닌 것에 거액을 소비한다는 말인가."
(1904년 7월 27일 '고종실록', 의정부찬정 권중현 상소)
해군 창설도 취소됐다.
1905년 을사조약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덕수궁) 중명전 1층 회의실에서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11월 15일 일본 특명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에게 일본 천황 친서를 내밀며 승낙을 강요했다.
고종이 "사신 왕래 같은 형식은 보존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이토는 "외교에는 형식과 내용 구별이 없다"고 거부했다.
고종은 "외부대신에게 교섭, 타협에 힘쓰라고 하겠다"고 답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신명호,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재인용)
17일과 18일 사이 심야에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속칭 '보호' 조약이 체결됐다.
22일 이토가 탄 열차에 원태근이라는 사내가 돌을 던졌다.
원태근은 곤장 200대와 금고 2개월 형을 받았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월 27일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가 "조약을 폐지하고 역적을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황제는 "크게 벌일 일이 아니니 귀가하라"고 답했다.(1905년 11월 27일 '고종실록')
상소가 이어졌다. 고종은 "다 잡아들이라"고 명했다.(11월 28일 '고종실록')
11월 30일 쫓겨난 민영환이 집에서 자결했다.
황제는 그날 민영환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의정대신을 추증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2월 1일 조병세가 자결했다. 고종은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민영환의 시호도 충정으로 바꿨다.
을사 역적들이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모양 좋게 조처하라'는 폐하 명령대로 했을 뿐"이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고 답했다.(1905년 12월 16일 '승정원일기')
세월이 갔다.
중명전 기념사진과 고종
정미년인 1907년 7월 19일 고종이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나흘 뒤 정미조약이 체결됐다.
군사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소령 박승환이 자결했다.
그날 남대문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최초로 맞붙은 시가전이었다.
전투는 반나절 만에 일본군 승리로 끝났다.
그해 12월 어느 날 을사조약이 체결됐던 중명전에서
을사조약과 정미조약 당사자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황태자 은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옛 황제가 촬영 장면을 구경했다.
사진가도, 내각도 황제에게 비키라고 하지 못했다.
1909년 11월 29일 대한제국은 양무호를 일본 오사카의 원전상회(原田商會)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110만원짜리 군함의 재판매 가격은 4만2000원이었다.('고종시대사' 6집)
※2018년 '땅의 역사'는 147회를 끝으로 쉽니다. 2019년에 다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