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영국에서 연극이 대중의 오락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16세기 후반, 흥행의 보증수표는 '복수극'이었다.
공연도 환한 대낮에 이루어졌고, 무대 장치도 엉성했고, 관객 수준도 높지 못했던 때,
관객의 공감과 몰입을 가장 쉽게 유도할 수 있는 소재가 '복수'였기 때문이리라.
사실 복수극의 족보(族譜)는 고대 희랍과 인도의 서사시로 거슬러 올라가고,
한국의 '막장드라마'에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인류사에서 씨족사회나 부족사회가 범죄를 예방하거나 처벌할 역량이 없었던 단계에서는
혈족의 살상(殺傷)에 대한 복수가 의무였다.
그러나 복수는 과도해지기 쉽고 엉뚱한 대상한테 행하기도 쉽다.
그래서 현대 문명국가들은 사적 보복을 금하고 법에 의해서만 해결하도록 한다.
그리고 종교는 용서를 최고의 미덕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복수심 앞에서 종교의 가르침은 대개 무력하다.
그리고 복수심의 승화를 가르치는 대신 증오를 주입해서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을 권력 투쟁 도구로 삼으려는 기획이 무성하다.
우리나라의 '운동권'은 증오와 (대리)원한의 교습소였다.
며칠 전 유성기업의 노조원들이 회사 간부를 폭행한 사건은
인위적으로 배양된 '원한'이 인간을 맹수로 만들고 문명을 파괴하고 법을 무력화하는 실상을 보여주었다.
작년과 올해 우리나라는 국가가 법률의 이름을 빌려 복수의 카니발을 벌이고 있다.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은 무소불위의 흉기가 되어 '촛불' 세력에 밉보인 모든 인물, 기관, 세력을 때려눕혔다.
자리에서 쫓겨나 처절하게 무력해진 전직 대통령을 위시해서 군, 사법부, 검찰, 정보기관, 대기업 등
국가의 버팀목들이 무차별 폭격을 맞아서 국가의 안보도, 치안도, 국민의 의식주도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강성 노조들의 복수심은 기어코 나라를 박살 내고야 말 것 같다.
그리고 이 정부는 124년 묵은 '동학혁명'을 파헤쳐서 보복 대상이 고갈되지 않게 하려는 모양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힌들리씨는
거리의 고아 히스클리프를 자기 집에 데려와 아들처럼 키운다.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씨의 딸 캐시에게 배척당한 원한 때문에
은인의 아들, 사위, 손자, 손녀, 사돈,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죽도록 괴롭힌다.
우리나라엔 얼마나 더 잔인한 폭풍이 휩쓸고 가야 화합의 봄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