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개혁을 꿈꾼 광해군과 유배지(流配地) 제주
한 해 1500만명이 찾는 관광지 제주도, 조선 시대엔 정치범들 단골 유배지
1641년 개혁 군주 광해군, 제주 유배 4년 만에 병사
개혁·개방 꿈꾸던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 뒤 1647년 그 세 아들도 제주로 유배
첨단 기술자 집단 하멜 일행, 1653년 악천후에 제주 난파… 13년 만에 나가사키로 탈출
나가사키 공무원은 군사-경제 등 집중 심문, 제주 관리는 '양주' 접대받아
이후 13년 내내 조선은 풀 뜯기 따위 허드렛일 시켜
제주에서 목격하는 '우리가 잃어버린 기회들'
송시열과 제주도
1689년 음력 3월 3일 노론계 대부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를 왔다. 친족 몇과 함께였다. 나흘 뒤 그가 권치도라는 후학에게 편지를 썼다. '한라산에는 눈이 잔뜩 쌓였는데 산 아래는 꽃들이 화려하게 피었네. 성은(聖恩)이 관대하여 나 같은 죄인을 이런 곳에 쉬게 해 주시니 감사한 마음 한이 있겠는가.' 지금 해마다 관광객만 1500만명이 넘는 섬나라, 제주도다. 그 기이한 풍광에 홀려 노 정치가는 성은에 감사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관광객이 아니라 귀양객이었다. 조선 왕실에서 고를 수 있는 최악의 유배지에 귀양 온 정치범이었다. 그래서 두 달 뒤 그가 이리 읊는다. '아우와 형 손자, 조카가 함께 있으니 하늘 바깥이라도 기쁘구나(弟兄孫子姪 天外喜同堂)' '천외(天外)'. 하늘 바깥이지 사람 사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 바깥으로 패대기질을 당했으니, 참으로 불운이었다.
하늘 바깥 제주도와 유배 문화
제주도에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뭍에서 고등 지식을 가진 권력자가 걸어 들어왔으니까. 섬사람이라 괄시받던 제주 사람들은 유배자들을 찾아가 글을 배우고 예법을 배웠다. 언제 권력을 되찾고 중앙으로 돌아갈지 모를 사람들이기에 접대도 따뜻했다. 제주 대정현 최고 갑부 강도순은 유배된 추사 김정희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아들 가정교사를 청했다. 대정향교는 추사를 초빙해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뭍사람들 가운데 다섯을 현자(賢者)라 기리며 세웠던 오현단(五賢壇)이 제주시 한가운데에 남아 있다.
잃어버린 기회, 유배
섬나라 제주에는 행운이었으나, 나라 전체에는 불행한 일이었다. 그 숱한 고등 인력을 일절 소통을 막아버린 채 천 리 바깥 섬에 가둬놓은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주에 흘러온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는 자들이 셋 있으니, 바로 광해군과 소현세자 가족,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 헨드릭 하멜이다. 17세기 중엽 1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차례차례로 제주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자, 이 순서대로 이들이 남긴 흔적과 이들로 인해 사라져버린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폭군 혹은 개혁 군주 광해(光海)
1637년 음력 6월 16일 폐군 광해군이 사방을 장막으로 가린 배를 타고 제주도 구좌읍 행원 포구에 도착했다. 나이는 예순세 살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지 14년 만이었다. 이미 경기 강화도와 충청 태안을 거쳐 유배 생활에 이골이 났지만, 마중 나온 관리가 제주도임을 알려주자 서럽게 울었다. 권좌에서 쫓겨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죄, 궁궐 넷을 무리하게 중건해 백성들을 괴롭힌 죄, 조선을 구원한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편든 죄. 죄목은 어마어마하지만, 핑계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서적을 간행했다. 대동법을 시행해 피폐한 백성 경제를 부활시켰다. 사멸하는 명나라 대신 신흥 강국 후금(後金)을 인정하고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후금과 전쟁에 군사를 보내라는 명나라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망가진 나라를 또 전쟁에 빠지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요 의지였다. 이미 세자 시절인 임진왜란 초부터 아버지 선조에게서 왕권을 위임받고 행해온 정치의 연장이었다.
제주에서 사라진 광해의 꿈
그런데 잠시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이 재집권을 위해 광해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궁궐 공사? 배다른 동생 영창 살해 혐의? 명에 대한 배신? 모두 재집권을 위한 명분으로 사용됐다. 광해는 결국 왕위를 빼앗겼다.
이리저리 떠돌던 폐군의 최후 행선지가 제주도였다. 광해는 제주성 안에 있는 집에 갇혔다. '하늘 구멍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탱자나무 가시가 빽빽한' 집에서 산송장으로 살았다. 이를 위리안치(圍籬安置)라 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641년 7월 1일 병사했다. 그날 내린 비를 광해우(光海雨)라 불렀다. 제주목 관아 앞 관덕정에서 제사를 지내고 관은 섬을 한 바퀴 돈 뒤 경기도 남양주에 묻혔다. 유배지 터에는 은행 건물이 들어섰다. 표석 하나 남아 있다.
제주 사람들은 광해군을 인자한 왕이요 시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조선은 전후 경제를 살리고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던 개혁 군주를 상실했다. 그 상실한 흔적이 21세기 제주에 남아 있다.
좌절된 개혁 그리고 소현세자
광해군이 죽고 6년이 지난 1647년 제주도에 네 살배기 사내아이 석견이 유배를 당했다. 큰형 석철, 작은형 석린과 함께 도착한 석견은 곧바로 제주성 어딘가에 유폐당했다. 역시 가시덤불 가득한 집이었다. 이들 아버지 이름은 이왕이다. 세간에 소현세자로 알려져 있는 사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 맏아들은 소현, 둘째는 봉림대군이다. 아비 인조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땅에 박아대며 항복을 하고, 두 아들은 청 수도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9년 만인 1645년 돌아온 아들들은 세계관이 달랐다. 소현은 청에 와 있던 숱한 서양인을 만나며 개안(開眼)을 했다. 독일 선교사 아담 샬은 소현에게 천문지식을 가르쳐 주고, 유럽이라는 땅을 가르쳐줬다. 소현세자는 귀국과 함께 아비 인조에게 이리 말한다. '청과 유럽 기술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겠어요.'
권력 유지에 급급했던 인조와 추종 세력은 오랑캐 세계관을 가지고 온 세자를 놔두지 않았다. 귀국 후 두 달이 채 안 돼 세자가 죽었다. 시체가 검고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피가 흘렀다. 독살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세자위는 동생 봉림이 계승했다.
이듬해 세자빈 강씨가 역모를 꾀한 혐의로 사약을 받았다. 또 이듬해 강씨 자식이라는 죄로 세 아들이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다. 사약을 내린 이는 시아버지, 유배형을 내린 이는 친할아버지, 인조였다. 석철과 석린은 1년 만에 죽었다. 막내 석견은 전국 유배지를 떠돌다 삼촌 효종에 의해 복권됐다가 스물둘에 죽었다.
자, 광해군이 죽고 4년 뒤 소현세자가 죽었다. 개혁과 개방을 통해 강국(强國)으로 갈 수 있던 조선이 또 한 번 주저앉고 말았다는 뜻이다. 큰 그림 대신에 죽어도 명나라와 성리학을 외치던 권력층이 벌인 참극이었다. 세자 아들들이 제주에 오고 다시 6년 뒤, 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주인공 이름은 헨드릭 하멜이었다.
기이하고 어이없는 하멜 표류기
1653년 7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타이완을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다. 양력 8월 16일 배는 악천후 속에 제주도 대야수 해변에서 난파했다. 서기 하멜을 비롯한 살아남은 선원 36명은 제주목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됐고, 이후 13년 동안 조선에 살다가 생존자들은 일본으로 탈출했다. 탈출 이후 하멜은 13년 동안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표류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 제목은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웨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 바로 '하멜 표류기'다.
유럽 최강 해양국 네덜란드에서 최고급 인력 36명이 굴러 들어왔다. 몸이 들어온 게 아니라 그 당시 첨단항해술, 무기술과 경험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하멜 일행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조선에는 최고의 기회였다. 세상을 향한 거대한 창문이 눈앞에 열린 것이다. 그 거대한 창문 앞에서 대정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은 이리 행동하였다.
'그들은 포도주 맛을 보더니 맛이 있었던지 아주 많이 마셨고 대단히 행복해하며 우리 상급선원들을 텐트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 전에 가져간 은 술잔도 되돌려줬다.'(하멜 표류기 中) 실록에는 기록이 없으니, 단군 이래 최초로 서양인으로부터 양주를 접대받은 사실은 중앙정부에 보고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하멜 일행은 광해군이 묵었던 유배지에 머물다 서울 압송 이후 강진, 여수 등지를 떠돌다 13년 20일 뒤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그런데 하멜 일행을 대한 일본 나가사키 공무원 태도가 섬뜩하다. 난파선 규모 및 항해 목적, 조선의 군부대 배치 현황, 경제, 풍습, 종교, 탈출 경위가 포함된 5개 분야 54개 항을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조선이 13년 동안 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서 한 일은 '풀 뜯기' '땔감 베어오기' '양반집 구경거리 되기' '구걸하기'가 전부였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그 거대한 창문 앞에서 할 일은 분명 아니었다.
자, 결론이다. 광해군이 제주에서 죽고 6년 뒤 소현세자의 아이들이 제주에 왔다. 그리고 6년 뒤 하멜이 제주도에 왔다. 그 12년 사이에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가. 200년 뒤 불어닥친 외세의 거친 개항 요구는 그때 창문을 닫아버린 탓은 아니었을까. 이 여름, 하늘 바깥 제주에 가거들랑 물어보시라.
[6월 1일(목) 오후 8시 40분, TV조선 '땅의 역사-제주편' 방영]
6월 1일 목요일 오후 8시 40분 채널19 TV조선에서는 ‘박종인의 땅의 역사-제주편’을 방송한다. 광해군과 소현세자, 네덜란드 선원 하멜로 상징되는 ‘세계를 향해 열린 창(窓)’에 얽힌 역사의 현장을 찾아간다. 지면에 소개되지 않은 21세기 제주도의 풍광, 추사 김정희의 유배 생활, 제주도에 유배된 조선 시대 고위 정치가들의 뒷이야기도 함께 소개된다. 제주도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이재수의 난’에 얽힌 이야기도 소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