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

[46]가야산에는 권력의 흔적… 몽산리에는 民草의 돌부처…

colorprom 2016. 7. 27. 15:58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가야산에는 권력의 흔적몽산리에는 民草의 돌부처

입력 2016.07.27 03:00 | 수정 2016.07.27 16:04

[46] 신평양조장 김용세와 당진~태안, 내포(內浦) 이야기

뭍과 바다 뒤섞인 충청남도 서쪽 內浦 지역
토정·율곡과 교류하며 임진왜란 예언한 기인 김복선 전설도
83년째 한자리에서 술 빚는 김용세 양조장
황제 집안 되려고 절 불태우고 이장한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영탑사 석탑과 몽산리 돌부처에는 민초들 정성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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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북서쪽 홍주, 결성, 해미, 태안, 서산, 면천, 당진, 덕산, 예산, 신창을 합쳐서 내포(內浦)라고 한다. 1751년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나오는 말이다. 이 열 마을은 모두 '가야산 앞뒤에 있다'고 했다.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항구가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역이다. 항구와 뭍이 뒤섞이다 보니 신문물도 일찍 들어왔고 사람들도 신문물에 개방적이었다. 이를 내포 문화라 부른다. 조선 선조 때 사람 김복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태어난 지 적어도 400년이 됐지만 워낙에 이인(異人)이라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문도 있다. 김복선처럼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 흔적을 찾아 내포로 간다.

기인 김복선과 당진


 

당진~태안 여행지도

토정비결을 쓴 토정 이지함이 내포 지역 당진 땅 옆 아산 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천문과 수리에 능한 이 이인(異人)이 살펴보니 내포 일대가 곧 물에 잠길 참이었다. 이에 놀라 백성을 모두 대피시키는데 봇짐장수 하나가 말을 듣지 않고 지게를 땅바닥에 세우곤 주저앉는 것이었다. 과연 하늘에서 큰물이 내리고 바다에서 더 큰 물이 밀려왔지만 딱 지게를 꽂은 거기까지만 물이 차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김복선이었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본다. 토정의 명성과 성품을 익히 알던 김복선과 천민이되 지혜로운 김복선을 알아본 토정은 친구가 되었다. 마침 내포 땅에 은둔한 유학자 송익필과 교류하던 율곡 이이가 김복선을 찾아와 토정과 함께 나랏일을 걱정하게 되었다. 어느 날 토정과 율곡이 훗날 왜구와 벌어질 전쟁을 걱정하자 김복선이 이리 말했다. "두 분 선생은 인신년상사(寅申年喪事)인데 어이 임진년 일을 걱정하시오." 그리고 덧붙였다. 김복선은 "내가 나서면 임진년 전쟁은 3년이면 끝나나, 내가 천민이니 나라가 쓸 리 만무하고, 이순신이라는 장수가 7년 만에 전쟁을 끝낼 것이오." 과연 토정은 무인년(1578년)에 죽었고 6년 뒤 갑신년에 율곡이 죽었다. 그리고 1592년 임진년에 전쟁이 터졌다. 김복선이 두 사람을 배웅한 곳은 해발 64m짜리 망객산(望客山)이다. 김복선이 오줌을 눈 오줌바위도 있고 그가 개간했다는 논도 남아 있다. 망객산은 신평면에 있다.

신평면에 사는 김용세

술 빚는 김용세씨 사진
술 빚는 김용세.

김용세는 술 만드는 사내다. 올해 일흔세 살이다. 대학교 졸업하고 대학원 졸업하고서 아버지 김순식으로부터 신평양조장을 물려받았다. 1960년대 행정학 석사가 됐다고 딱히 고관대작이 될 확률이 큰 것도 아니어서 아픈 아버지 도와서 가업을 잇는 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조장은 1933년에 문을 열었다. 그가 말했다.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게 술도가였으니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론과 실제는 달라서 난감했다. 그래서 술 제조법을 공부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책이 없는 것이다. 아주 난감했다."

왕실에서는 실록이다, 일기다 하며 기록을 이어갔지만 민간에서는 술 만드는 법조차 가문의 비밀로 기록을 꺼렸다고 했다. 오죽하면 짚신 못 팔아먹는 아들에게 아비 짚신 장수가 죽을 때에야 귓속말로 "아들아, 짚신 팔아먹으려면 터럭을 잘 다듬으면 된다"고 비밀스럽게 제조 노하우를 구전(口傳)했을까. 그래서 일본인이 만든 탁주·청주 제조법 책자를 섭렵하고, 실전에서 수없이 응용한 끝에 술맛을 해독했다. 그가 말했다. "책대로 만들면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실험해서 제 술맛을 찾고 보니 책이 맞더라."

수덕사 스님들에게 배운 다도(茶道)를 응용해 백련(白蓮) 잎을 막걸리에 넣으면서 김용세식 술맛이 완성됐다. 2007년 연꽃 향이 은근하게 밴 신평양조장 막걸리는 청와대와 삼성그룹 건배주로 선정됐다.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 김동교가 아버지 일을 돕다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3대 술도가 주인으로 들어왔다. 1933년 문을 연 양조장은 그때 그 자리에 서 있다. 술맛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아들로 대를 잇는다. 83년째다.

농촌 개혁의 꿈, 심훈과 필경사

신평양조장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가면 필경사(筆耕舍)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무슨 글을 대신 써주는 곳이 아니다. '상록수'를 쓴 소설가 심훈이 살던 집이다. 4년 동안 살았다.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난 심훈은 3·1운동을 거쳐 중국으로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와 소설을 썼다. 영화도 만들었고 출연도 했다. 그러다 1932년 장조카 심재영이 사는 당진으로 내려왔다. 사랑채에 묵으며 글을 쓰다가 인세를 모아 집을 지었다. 집 이름이 필경사다. '붓으로 밭을 간다(以筆爲耕)'는 뜻이다.

이곳에서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탈고했다. 상록수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당진 내포 땅에서 나왔다. 장조카 심재영은 박동혁으로 등장했다. 박동혁은 농촌 개혁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이다. 심훈은 조카와 함께 직접 농촌을 체험하며 상록수를 쓰고,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필경사는 이후 교회로 쓰이다가 장조카 심재영이 사들여 당진시에 기증했다. 지금은 심훈기념관으로 쓰인다. 경기도 안성에 있던 심훈 묘도 이곳으로 이장했다.

예산 남연군묘

잠시 당진을 떠나 남하하면 예산 땅이 나온다. 예산에는 수시로 대형 승용차가 나타나 주변을 꼼꼼히 살피고 사라지는 무덤이 하나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다. 정적(政敵)들 눈을 피해 파락호 생활을 하던 이하응은 어느 날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명당'이란 얘기를 듣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묘 이장을 결심한다. 그런데 충남 가야산 자락에 있는 그 명당 터에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있는 게 아닌가. 흥선은 주지를 매수한 뒤 사람을 시켜 절을 불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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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 지역에 속하는 충남 예산 가야산에는 남연군 묘가 있다. 천하제일 명당이라는 곳이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고 선친 묘를 이장했다. 이후 고종과 순종 황제가 나왔고 나라는 망했다. /박종인 기자

그 무렵 형제들 꿈에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귀신이 출몰하자 흥선은 "즉 진짜 명당이라는 말"이라며 이장을 감행했다. 과연 아들은 고종 황제가 되고 손자는 순종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2대 만에 나라가 망했다. 그 명당 자리에 가면 풍수에 일자 무식한 사람도 감탄이 나온다. 과연 어디에 무엇이 모자라 2대 만에 나라가 망했는지 설은 분분하되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영탑사 칠층석탑과 몽산리 석불

권력욕이 가야산 자락에 흔적을 남겼다면 아미산 영탑사와 태안 몽산리 석불에는 민초의 무한한 애정이 숨어 있다. 영탑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유리광전 뒤편 언덕에는 칠층석탑이 있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절을 중건하면서 오층석탑을 세웠다. 이후 조선 초 무학대사가 석탑을 유리광전 뒤편 언덕으로 옮겼다. 그리고 1911년 신도들이 2층을 더 올려 7층 석탑으로 지었다. 일곱 층짜리 석탑 하나 만드는 데 1000년이 넘게 걸렸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울 때 살아남은 석탑을 옮겨왔다는 말도 있다. 어느 이야기든 상관없다. 느껴지지 않은가. 석탑에 대해 민초들이 품고 있는 애정이.

민초들이 정성들여 보듬은 태안 몽산리 석불. 못 생겼으되 애정이 가득하다.
민초들이 정성들여 보듬은 태안 몽산리 석불. 못 생겼으되 애정이 가득하다.
당진 아미산에 있는 영탑사 칠층석탑. 신라 말 도선국사가 세운 뒤 1911년 주민들이 중수할 때까지 1000년이 걸린 탑이다.
당진 아미산에 있는 영탑사 칠층석탑. 신라 말 도선국사가 세운 뒤 1911년 주민들이 중수할 때까지 1000년이 걸린 탑이다.

태안 몽산리 야산에서 만나는 석가모니 석불은 더하다. 철저하게 훼손된 돌부처를 주민들이 정성 들여 수선해놓았다. 미적 감각이 없는지라 사라진 눈과 코와 입은 시멘트로 발라 그려넣었다. 옛 석물들을 모아 아담한 돌탑도 복원해놓았다. 지독하게 못생겼고 엉성하지만 돌부처에 대한 애정이 가슴 뭉클하게 읽힌다. 이게 내포 문화다.

안국사지석불. 황량한 여타 절터와 달리 안국사지는 화려하고 아늑하다.
안국사지석불. 황량한 여타 절터와 달리 안국사지는 화려하고 아늑하다.
김대건은 내포 당진에서 태어나 천주교를 받아들여 조선 첫 신부가 되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 솔뫼성지다. 고려시대 절터 안국사지에는 커다란 석불 3기가 서 있다. 지금 주지 원상 스님 10년 넘도록 그 앞에 돌로 만든 정원을 꾸미고 산속에 별세계를 꾸미고 있다. 대개 사라진 절터는 황량하고 허무하지만, 안국사지에서는 오히려 미래가 보이니 이 또한 내포 땅이 가지고 있는 적극성과 개방성이다. 영탑사가 있는 아미산 자락에는 젊은 예술가 부부가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한 아미미술관이 숨어 있다. 교실마다 귀한 작품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전국 팔도에서 그 미학을 보려고 당진으로 몰려온다. 강산이 수십 번 바뀌고 세월은 여러 겁 흘렀지만 내포(內浦) 땅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든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26/20160726028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