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

(52)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와 석장리 사람들 (박종인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6. 9. 21. 13:29

[박종인의 땅의 歷史] (52)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와 석장리 사람들

고마나루(공주) 언덕에 잠든 백제 부활의 꿈
    박종인

    발행일 : 2016.09.21 / 기획 A22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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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이상한 꿈―무령왕릉 발견기

    1971년 7월 4일 국립중앙박물관 공주 분관 관장 김영배는 꿈을 꾸었다.

    산에서부터 쫓아온 멧돼지 한 마리가 집 안까지 난장판을 치는 꿈을 꾸었다.

    7월 5일 김영배송산리 고분 배수로 공사를 감독하다가 보고를 받았다.

    인부가 찌른 삽에 벽돌벽이 나왔다고 했다.

    벽을 죽 따라 파 들어가니 기왓장으로 가득 메운 아치형 문이 나왔다.

    7월 7일 폭우가 쏟아졌다. 8일 아침 본관 관장 김원룡김영배는 막걸리와 수박과 북어로 위령제를 지냈다.

    오후 4시 15분 아치형 문 맨 위쪽 기왓장 두 개를 빼내는 순간

    찬 공기가 빠져나오면서 하얀 수증기가 뿜어 나왔다.

    손전등으로 속을 비추던 김영배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꿈에 봤던 그 멧돼지가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잠시 뒤에는 기왓장 몇 장을 더 들어내던 김원룡이 놀랐다. 돼지 석상 앞 널판에 글자 열 개가 보였는데,

    거기 적혀 있기를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 하지 않는가.

    주인이 백제 25대 왕 무령왕이라고 밝혀놓은, 그것도 도굴 한 번 당하지 않은 왕릉을 발견한 것이다.

    대한민국 고고학 사상 최대 경사(慶事)요, 낭보였다.


    이후 열두 시간 동안 바보 천치가 쓴 대본에 광인(狂人)이 연출한 비극이 전개됐다.

    곰族의 수도, 공주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 온조비류 형제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웠다.


    온조는 한수(漢水·한강) 남쪽 위례성에 십제(十濟)를 세웠다.

    비류는 미추홀, 그러니까 인천에 나라를 세웠다. 미추홀은 곧 망했다.

    비류가 죽고 바로 온조에 흡수됐다는 말도 있고 300년 뒤 고구려 광개토왕한테 망했다는 말도 있다.

    이후 십제는 국명을 백제로 바꿨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위례성에 쳐들어왔다. 백제 개로왕이 전사했다.

    이에 맏아들 여도(餘都)가 왕위를 이어받고 건국 후 493년 만에 남쪽 금강변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를 옮기면서 이들과 동행한 믿음이 있었으니, 바로 이었다.

    금강변 새 수도는 고마나루라 불렀다. 고마는 이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고마나루는 웅진(熊津)이 되었고

    훗날 고려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공주(公州)라 개칭했다.

    '곰주'라 발음되는 한자가 없어서 붙인 이름이 공주다.


    신화에 따르면 단군곰의 아들이다.

    고조선에서 부여, 부여에서 고구려로 물려받은 곰 토템백제까지 전승됐다.

    고마나루에 깃든 곰 신화는 이렇다.


    '산중에 살던 암곰이 사내 하나를 납치해 아이 둘 낳고 살았다.

    어느 날 동굴에서 탈출한 사내가 금강을 헤엄쳐 건너자 암곰이 울부짖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고마나루에는 폭풍이 끊이지 않아 사람들은 해마다 곰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지금도 지낸다.'


    시베리아와 중국 흑룡강성 일대에 퍼져 사는 에벤키족(중국명 어원커·?溫克)도 똑같은 곰 신화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에서 인간화(人間化)된 곰 신화가 백제에서는 원형이 회복돼 있다.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 주변 옛 지명도 '곰말', 곰마을이었다.


    지금도 일본인은 熊津이라고 쓰고 '구마나루'라고 읽는다.

    熊本이라고 쓰고 구마모토라 읽고 熊川이라고 쓰고 구마가와라고 읽는다.

    1972년 이 고마나루 땅속에서 곰 석상이 발견됐다. 공주 사람들은 그 자리에 곰사당을 세웠다.

    역대 왕조에서 곰에게 제사를 지낸 웅진수신지단(熊津水神之壇)도 터가 남아 있다.

    그 뒤 소나무숲은 그윽하기 이를 데 없는데,

    옛 백제인들이 상륙했을 고마나루 백사장은 4대 강 사업 공주보 덕에 강물 속으로 말끔히 사라졌다.

    구석기를 발굴한 석장리

    그 백사장에서 전은성(63)과 김희환(76)과 김종근(79)과 박홍례(82)는 가난하게 살았다.

    고마나루에서 강을 따라 25리 동쪽 석장리에서 나서 지금껏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김희환이 말했다. "하루 종일 산에서 나무 해다가 공주장에 짊어지고 가서 팔아먹고 살았다."


    그러다 1964년 4월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큰일이 터졌다.

    알버트 모어라는 미국인 커플이 백사장 옆 폭우로 무너진 흙더미에서 구석기를 발견한 것이다.


    발견은 연세대 교수 손보기 팀의 본격적인 발굴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선사(先史)를 순식간에 제2빙하기인 55만~45만년 전, 심지어 70만년 전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로

    이어졌다.


    1964년 5월 1차 발굴부터 2010년 13차 발굴까지 현장을 지켜온 사람이 바로 위 네 사람이다.


    "고맙지. 땅 긁어내서 돌 파내면 일당을 줬으니까. 3000원이었나?

    짐승 털 발견하면 막걸리 한 말이랑 담배 한 갑을 준대. 그래서 찾아내면 그날은 잔치야.

    나중 되니까 우리도 보는 눈이 생겨서 척 보면 범상치 않은 돌이 보이더라고."


    주먹도끼, 찍개, 몸돌…. 유물들이 이들 손에서 땅 위로 튀어나오면 학자들은 분석을 했다.

    해마다 봄 두 달 마을 사람이 총동원됐다.

    발굴팀장 손보기는 젊은 주민들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며 지휘를 했다.

    춘궁기 때 나뭇짐 지고 장터 가던 팍팍한 삶은 멈췄다.

    연천 전곡리, 도라산역, 단양 금굴, 제천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전국 석기 유적지에는 '최초로 구석기를 발굴한 인부팀'인 석장리팀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김종근김희환은 외국 학술대회에도 교수팀과 동행했다.

    구석기에 살고 있는 석장리

    세월이 흘러서 석장리대한민국 구석기를 대표하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 앞에는 2006년 석장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박물관 옆에는 구석기를 개척한 손보기기념관이 서 있다.

    그런데 석장리는 여전히 구석기다.

    전은성이 말했다.

    "가난 탈출하게 해주고 마을 이름 빛나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

    그런데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이면서 박물관에서 500m까지는 개발을 할 수가 없게 됐다.

    땅값도 옆 마을 반도 안 된다."


    네 사람, 이 발굴 현장 전문가들이 말했다.

    "단언컨대 석기는 강변에서만 나온다. 우리가 잘 안다.

    우리 마을에는 석기가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좀 살았으면 좋겠다."


    옛 사람 살던 땅 파놓았더니 그게 무덤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구석기라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석장리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고 구석기인들 노닐던 그 넓던 백사장은 아예 사라져버렸으니 이 어인 일인가.

    꿈의 시대 웅진백제와 왕릉 발굴

    고마나루에 상륙한 곰족 백제는 성을 쌓았다. 공산성이다. 이번에도 강 남쪽이다.

    63년 뒤 재천도한 사비성도 백마강 남쪽이었다. 무시무시한 북쪽 오랑캐 고구려를 경계하는 왕성 설계다.

    미래를 구상하며 임시수도로 삼았음이 분명한 이 공주 땅에 다섯 왕이 스쳐갔다.


    웅진 백제 네 번째 왕은 무령왕이다. 중국 사서 '양서'에는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패퇴한 백제가 고마나루에 자리를 튼 지 26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화려한 웅진백제는 바로 이 무령왕릉을 찾아내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송산리 고분은 일제 강점기 대부분 도굴됐다. 대표적인 도굴범이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다.

    1927년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일본어 교사로 부임한 가루베는 1000기에 이르는 백제 고분을 도굴해

    유물을 "빗자루로 싹싹 쓸어 담아갔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가루베를 '날파리 고고학자'라고 불렀다.

    1932년 그 가루베송산리 고분 가운데 6호분을 쓸어가면서 놓친 곳이 봉분이 깎인 무령왕릉이다.


    이제 이후 열두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본다.

    발굴단장 김원룡이 이렇게 후회했다.


    "이 엄청난 행운이 멀쩡하던 머리를 돌게 하였다.

    삽시간에 구경꾼과 경향 각지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신문기자들로 꽉 찼다.

    카메라를 서너 개씩 둘러멘 기자들은 어서 사진부터 찍게 해달라고 야단이다.

    한 신문사마다 2분씩만 찍기로 약속했는데, 안으로 마구 들어가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중략) 바닥 벽돌 틈에서 나무뿌리들이 수세미처럼 바닥을 덮었고

    썩은 널 사이사이에 구슬이니 금장식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실은 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베어 내고,

    그러고 나서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유물을 들어내고 바닥은 청소되었다.(하략)"


    발굴은 열두 시간 만에 끝났다. 몇 년을 걸려도 모자랐을 작업이었다.

    악의도 아니었고 무식해서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총체적인 무지(無知) 탓이다.

    대한민국 발굴사가 일천하고 왕릉에 대한 개념이 없던 탓이다.


    무령왕릉은 대한민국 고고학 사상 최고 최대의 발견이며 최악의 발굴이었고

    이후 각종 발굴 현장에서 어김없이 곱씹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지금 중장비를 동원해 시루떡 떠내듯이 땅을 떠내며 초고속 발굴 중인 경주 월성 발굴팀은

    메주가 뭐고 된장이 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송산리 고분군공산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송산리에는 무령왕릉 6호분을 재현한 모형왕릉실이 있다.

    진짜 왕릉은 보존을 위해 1997년 뒤늦게 폐쇄됐다.

    가보시라. 공산성에 올라 부활을 노리던 백제의 꿈을 느끼고 왕릉에서 그 백제의 화려함을 맛보시라.

    시간이 남으면 남쪽 우금치에도 가보시라.

    1894년 11월 관군에 패해 몰살된 10만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거기 서 있다. 유신 때 세웠다.


    부활한 왕국 백제와 기력이 쇠한 조선 왕조. 우리 가슴을 울려대는 역사 흔적이다.

    [그래픽] 공주 볼거리

    기고자 : 박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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