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충남 아산과 세계꽃식물원 남기중 가족
어라산 중턱 송림 속 충무공 묘에선 장엄한 그의 꿈 느껴져
미완의 혁명가 김옥균, 능지처참당한 후 시신 일부 아산에 묻혀
'토정비결' 저자 이지함, 아산 현감 때 선정 베푼 흔적도
꽃 가꾸는 농부 남기중 가족 꿈도 활짝
이지함은 조선 중기 학자요 정치가다. 말년에 두 번 군수를 지냈다. 이순신은 조선 중기 군인이다. 전쟁 때 죽었다. 김옥균은 구한말 정치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중국 상해에서 죽었다. 충남 아산에 가면 인연 없어 보이는 이 세 사내 흔적을 만난다. 사내들을 만나기 전 만날 사람이 있다. 이름은 남기중이고 직업은 농부다. 딸이 둘 있는데 그녀들 또한 농부다.
꽃세상, 농부 가족의 꿈
아산 사람 남기중(59)은 꿈을 꾸었다. 과수원집에서 태어난 어릴 때부터 똑같은 꿈을 꾸었다. "어른이 되면 나는 섬을 하나 사서 꽃밭을 만들 거다. 꿩도 사서 기르고." 초등학교, 중학교를 가서도 꽃과 흙에 미쳤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고등학교 안 가고 꽃 배우겠다고 했다고 얻어맞았다. 고등학교 강제로 입학하고 산에 다녔다. 에베레스트 가겠다고 설치다가 또 맞았다. 신구전문대 원예과에 들어간 1976년 4월 5일, 정신이 잠깐 돌아와서 산을 끊었다. 대신 꽃에 더 미쳤다. 학교 농장에서 먹고 자며 꽃을 배웠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듬해 건국대 원예과에 들어갔다. 군 제대 후에 평생 같이 살 여자를 만났는데 신구대 선배였다. 이름은 윤석원이고 두 살 위였다. 피터팬처럼 환갑 앞두고도 꽃밭에 꿈을 키우며 살 수 있게 해 준 여자, 고향 아산에 세계꽃식물원이라는 거대한 꿈을 개화하게 해준 여자다.
남기중은 88올림픽 직전 고향 땅에 화훼단지를 만들었다. 성화 봉송길 주변 가로 화단용 국화 5억원어치를 주문받았다가 취소가 됐다. 돈은 150만원 남았고 유치원생 딸 슬기와 기어다니는 딸 빛나가 있었다. 공부나 하라고, 그 여자 윤석원이 남자를 호주로 보냈다. 돈 없는 남기중은 청소만 원 없이 했다.
귀국해서 꽃병이 재발했다. "꽃도 팔고, 원예용품도 팔고 식물원도 만든다." 겁 없고 황당한 꿈을 또 윤석원이 지원했다. 1994년 영농조합 만들고 정부 돈 지원받아 45억원짜리 사업을 시작했다. 3년 뒤 IMF가 왔다. "인생이 거덜났다"고 했다. 꽃은 사라지고 비닐하우스 2800평은 텅텅 비었다. 채권단에 읍소하고 설명해서 완전 파산은 면했다. 대신 비닐하우스에 식물원 지어서 빚 갚겠다고 소리쳤다.
2004년 3월 19일 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남은 돈은 0원이었고 채워넣을 식물도 변변찮았다. 소문을 들은 주변 친구들이 꽃들을 보내줬다. 할머니 한 분은 "오래도 봤다"며 19년 키운 나무를 보내줬고 어떤 이는 이집트에서 몰래 가져온 씨앗을 싹 틔운 10년 된 난초를 보내줬다. 비닐하우스에 꽃 사태(沙汰)가 났다. 이름은 세계꽃식물원이라고 지었다.
12년 세월이 흘렀다. 과수원집 아이가 낳은 딸들과 아들은 식물원집 아이들로 자랐다. 젖먹이 빛나(29)는 미국에서 첼로를 전공하다 돌아와 허브를 기르고 제품을 개발한다. 첫째 슬기(32)는 일찌감치 농장일을 하다가 작년에 KAIST MBA를 마치고 식물원에 재합류했다. 막내아들 귀현(23)은 농수산대학교에서 화훼를 전공 중이다. 남기중은 결국 백합 재배 기법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식물원을 찾는 사람은 한 해에 20만 명이 넘는다. 식물원 대표가 된 딸 남슬기가 말했다. "일만 저지르는 우리 원장님(아빠를 그리 부른다), 우리 엄마 없었으면 어찌 됐을까." 꽃 세상 속에서 피터팬과 같이 사는 엄마 윤석원은 아무리 찾아도 볼 수가 없었다. "절대로 앞에 나서는 법이 없다"고 했다.
기인 이지함의 꿈
새해가 오면 고단한 삶들은 주술에 의지해 한 해 희망을 점치곤 했다. 정초 사람들이 들춰보는 비결은 토정비결이다. 비결을 쓴 사람은 토정이다. 토정은 호고 이름은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정치를 했다. 정치를 펼친 곳은 충남 아산이다.
이지함(1517~1578)은 서울 마포 사람이다. 조선 중종 때 사람이다. 토정은 흙 토(土)에 집 정(亭)이다. 흙집이다. 마포 강변에 흙으로 집을 짓고 살면서 성리학은 물론 의학과 천문과 지리와 수리를 공부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어릴 적부터 더위도 추위도 타지 않았다. 돈에 관심이 없고 남 돕기를 잘했다. 갓에 구멍이 뚫려 망가지자 집에 있는 쇠솥을 철모(鐵帽)로 만들어 쓰고 다녔다.
평생 공부만 하다가 말년에 경기도 포천 현감으로 추천받았다. 그때 임진강 범람을 예견하고 백성들을 피신시켜 칭송을 받았고 선정 또한 칭송을 받았다. 2년 뒤 아산 현감으로 추천받아 아산에 부임했다. 그때 그가 관아 한쪽에 걸인청을 만들었다. 떠돌아다니는 거지와 노약자들을 모아 체력에 따라 일감을 주고 일한 만큼 재물을 주었다. 그 흔한 선정비도 없이 포천을 떠났고 아산을 떠났다. 포천에서 떠날 때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가는 길을 막았다. 그가 한 선정과 기행이 후대까지 전해져 작자 미상의 토정비결 또한 그가 지은 책으로 세상은 알고 있다.
기인 토정 이지함이 선정을 베푼 관아터는 영인초등학교다. 학교 앞에는 관아 입구인 여민루가 남아 있다. 그가 이전시킨 아산향교도 인근인데, 이전한 연유는 알지 못한다. 향교 앞에 흐르는 개울 담벼락에는 사군자와 소나무 벽화작업이 한창이다. 평생 검약하게 살며 구휼과 선정으로 일관한 사내, 그가 이루려 한 세상이다.
풍운아 김옥균과 덧없는 꿈
김옥균은 풍운아다. 바람처럼 살다가 구름처럼 일순간 사라져버린 사나이다. 김옥균은 죽어서도 정처(定處) 없이 떠돌았다. 아산은 그 꿈이 흔적으로 남은 곳이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는 급진개화파의 거사가 갑신정변이었다. 주도자는 김옥균이었다. 1851년생이니 정변 때 나이 33세였다. 1884년 10월 17일 서울 종로 우정국 개국잔치에서 시작된 거사는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타도 대상이던 민씨 세력이 청나라 위안스카이 군대를 끌어들였고, 정변을 후원하던 일본 세력은 꼬리를 내렸다. 정변 세력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김옥균은 섬과 북방을 떠돌며 연금생활을 했다. 그러다 1894년 3월 청나라 상해로 망명했는데, 그곳에서 민씨 세력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시신은 조선으로 운반돼 서울 양화진에서 또 한 번 형을 당했다. 죽은 다음에 다시 한 번 온 몸을 찢어버리는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조각난 시신 가운데 머리는 일본인 친구가 거둬서 일본으로 가져가 장례식을 행하고 도쿄 청산영원에 묻었다. 1914년 그가 복권된 뒤 아산 군수로 재직하던 양아들 김영진이 그 묘에서 손톱과 발톱, 입고 있던 옷을 가져와 아산에 묘를 만들었다. 바람과 구름처럼 살던 혁명가가 정처한 곳, 아무 연고가 없는 이곳 아산이었다.
선정을 실천한 기인 이지함의 흔적과 미완의 혁명가 김옥균이 잠든 곳은 걸어서 10분 거리다.
이 땅에 평화-이순신과 공세리성당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가세가 기울며 외가가 있는 이곳 아산에서 자랐다. 이곳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과거에 급제해 무관이 되었다. 얼토당토않은 모함에 계급장 뜯기고 고문을 당했어도 끝까지 반역을 꾀하지 않고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전사했다. 1598년 11월 19일, 54세였다.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모신 유해는 이듬해 이곳 아산 금성산으로 왔다가 16년 뒤인 1614년 응봉면 어라산 덕수이씨 선산으로 이장됐다. 현충사에서 그가 남긴 행적을 볼 수 있다면, 그가 잠든 유택에 가면 그를 느낄 수 있다. 송림에 에워싸인 충무공 묘소가 장엄하다.
해거름이 찾아올 무렵 공세리로 북상했다. 조선시대, 충청 땅에서 나라에 쓸 재화를 그러모아 한양으로 보내던 공세창이 있던 곳이다. 그 창고가 있던 언덕에 1895년 성당이 섰다. 언덕으로 오르는 얕은 오르막길과 고딕양식 본당 주변 노거수(老巨樹), 본당을 에워싼 십자가의 길 모두 아름답다.
공세리성당 본당이 서기 전, 구한말 박해기에 신도 31명이 순교했다. 신도 가운데 이명래는 신부한테 배워서 고약을 만들었다. 지금도 공세리 마을 주민은 대부분 천주교도다. 지금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홀려 이 성지(聖地)를 찾는다. 주말이면 공세리마을 중앙통은 교통경찰이 나올 정도로 붐빈다. 그래서 성당 사람들은 아쉽다. 성지가 그저 볼거리로 전락했다고. 하지만 어쩌랴, 세상은 궁벽함을 벗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궁벽하니 그 마음 위로해줄 곳이 드문 탓이다.
이상이 아무 인연 없는 이지함과 이순신과 김옥균이 아산 땅에서 인연을 맺게 된 연유이고 성당에 나그네들이 잦게 출몰하는 이유였다. 그들로 하여 착하고 못됐고 찌질하고 용감한 우리네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아산에서 농부 가족이 꽃세상을 꿈꾸고 있고.
[아산 여행수첩]
1. 공세리성당: 1895년 조선 왕실용 조세창고가 있던 공세창에 건축된 성당. 병인박해와 신유박해 때 신도 31명이 순교했다. 신도 이명래가 프랑스 신부로부터 배워 만든 종기 치료약이 이명래고약이다.
2. 김옥균 유허: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으나 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 상해에서 암살당한 정치가. 서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된 시신 일부는 일본, 손톱과 발톱, 옷은 이곳 아산에 묻혀 있다.
3. 아산향교와 여민루: 토정 이지함이 환갑 때 아산 현감으로 부임해 정치를 한 흔적. 여민루는 아산관아 현관이고 향교는 토정이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관아는 영인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김옥균 유허와 여민루는 내비게이션에서 영인초등학교를 찾을 것.
4. 이충무공묘와 현충사: 서로 자동차로 15분 거리. 현충사에서는 충무공 생애를 '볼 수' 있고 묘역에서는 충무공의 삶을 '느낄 수' 있다.
5. 세계꽃식물원: 한 농부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곳. 남기중 원장 가족이 만들고 있는 꽃세상. 입장료 8000원. 7월은 꽃을 바꾸는 중이라 조금 어수선하다. 꽃, 화분, 허브 제품을 설명과 함께 구입할 수 있다. www.liaf.kr, (041)544-0746
6. 레일바이크: 구(舊)장항선 폐선로 들판을 달리는 왕복 4.8km. 2인승 1만8000원. 일바이크.com/">www.아산레일바이크.com, (041)547-7882.
7. 쇼타임코미디홀: 레일바이크 옆에 있는 개그쇼 상시공연장. 월요일 휴관. showtimehall.co.kr, (041)542-5145
- [지역 정보]
- 역사가 흐르는 아산은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