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바깥 세상

[일본][26]에도막부 몰락 부른 '책상머리 정책' (신상목, 조선일보)

colorprom 2018. 11. 2. 17:02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6] 에도막부 몰락 부른 '책상머리 정책'


조선일보
                             
  •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         
    입력 2018.11.02 03:12

    에도막부의 1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1773~1841)는
    40명의 측실과 53명의 자손을 두고 방탕한 생활로 국고를 탕진한 '속물 쇼군'으로 유명하다.
    1841년 이에나리가 사망하자 12대 쇼군 이에요시(家慶)가 폐정 개혁에 나선다.
    소위 '덴포(天保)의 개혁'이다.

    개혁의 실권을 쥔 로주(老中·막부의 국정 총괄자)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는
    당시 사회문제가 되던 급격한 인플레이션 해소를 급선무로 인식했다.

    그는 '가부나카마(株仲間)'를 물가 앙등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서민 생활 안정을 명목으로 가부나카마 해산령을 내린다.

    가부나카마란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공인(公認) 상인조합으로, 현대로 치면 일종의 기업 카르텔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문제는 이 조치가 현실을 도외시한 책상머리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인플레이션은 근본적으로 수요 증가와 막부의 저질 화폐 개주(改鑄)가 맞물려 발생한 것이었다.

    가부나카마는 독점, 경제력 집중 등의 폐해가 있었으나

    당시 경제 구조하에서 신용 기반 유통망을 통해 상거래의 안정성과 양적 확대를 견인하는 순기능도 있었다.

    가부나카마가 한순간에 해체되자 경제는 대혼란에 빠진다.

    이미 수십 년간 가부나카마를 중심으로 실물·금융 생태계가 형성되고 화폐가 돌고 있던 터였다.


    막부가 시장을 무시하고 급진적 대자본 규제 조치를 취하자 가장 먼저 충격에 노출된 것은 서민들이었다.

    유통망 붕괴로 생산·소비가 위축되고

    가부나카마의 신용 제공이 중단되자 영세 상공인들부터 생계를 잃고 빈곤층의 곤궁이 더욱 가중되었다.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으로 서민의 삶이 파탄에 처하자 막부의 무능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찔렀고

    민중 봉기가 줄을 이었다.


    저항에 놀란 막부는 1851년 해산령을 철회하며 민심을 달래보려 했지만,

    막부체제의 한계에 대한 불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1860년대 이후 막부 몰락, 근대화 유신(維新)의 배경에는

    페리 흑선의 외압 이전에 시대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집권 세력의 경세(經世) 무능과 실정(失政)이 있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1/20181101035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