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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 에도시대의 일본은 왜 임진왜란을 수없이 사과했나

colorprom 2018. 10. 6. 15:42



에도시대의 일본은 왜 임진왜란을 수없이 사과했나


조선일보
                             
             
입력 2018.10.06 03:00

조선통신사의 견문기 35권 분석
"도요토미는 일본의 이었다"며 막부시대에 수차례 조선에 사과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창비444쪽|2만5000원


10일부터 제주에서 열리는 관함식에 일본 해군이 욱일승천기를 앞세우고 참가하는 문제를 두고

우리 해군과 갈등을 빚은 끝에 불참을 통보했다.

두 나라는 위안부 동원과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에서도 식민 지배의 음영을 쉽사리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재일교포 3세 학자로, 한·일 양국을 오가며 공부했고 현재 중국 중산대에서 동아시아 교류사를 연구하는

저자는 두 나라 관계 개선의 해답을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화해 노력에서 찾는다.


1590년부터 1764년까지 170여 년간 일본에 다녀온 조선 선비들이 남긴 견문기 35종 기록을 통해

저자는 조선 선비들의 대일(對日) 인식이 극적으로 변화했음을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양국 지식인들이 기울인 노력도 이 책에 담았다.

처음에는 적개심이 화해하려는 마음을 눌렀고 동질성보다는 차이가 두드러졌다.

정유재란일본에 잡혀가 3년간 억류됐던 강항

그들의 야만적인 사생관(死生觀)을 질타한 것이 대표적이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好生惡死]이 사람이나 물(物)이나 같은 마음인데,

일본인들이 죽음을 좋아하고 삶을 싫어하는 것[樂死惡生]은 어쩐 일인가?"(강항 '간양록')


하지만 교류가 거듭되며 조선 선비들은 일본인들이 꼭꼭 숨겨 놓은 삶에 대한 애착을 읽어냈고,
유교적 인(仁)을 함께 이룰 이웃으로 그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믿지 못해 칼을 차고 마주 앉는 것도,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만큼 취하지 않도록 술을 절제하는 것도 생명을 아끼기 때문임을 간파했다.
사무라이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충성을 쌀과 바꿔야 하기 때문이었고,
전사할 때 칼을 얼굴로 맞는 것은 도망가다가 등으로 맞았다간 남은 가족이 생활고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에도(현재의 도쿄)거리를 가득 메운 일본인들이 조선통신사 일행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에도(현재의 도쿄)거리를 가득 메운 일본인들이 조선통신사 일행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1760년 방일한 선비 원중거가 접한 일본강항이 알던 그 일본이 아니었다.
에도(江戶) 막부는 유학(儒學)을 장려했고, 무사라 해도 공공장소에서 칼 뽑는 것을 금지했다.
일본인들은 통신사 행차를 축하하는 대포 소리에 놀라 귀를 막고 흩어질 만큼 유약해졌다.

일본임진왜란의 과오도 기회 있을 때마다 사과했다.
18세기 일본 문인 나와 로도는 조선통신사와 대화하는 자리에서
"히데요시 정권은 조선보다 일본에 더 큰 해를 끼쳤으니 어찌 조선의 원수에 그치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선 선비들의 대응은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였다.
원중거는 '화국지'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부대 편성, 전쟁에 참여한 장수 이름과 직책,
각 부대가 살육한 조선인 수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서
"내가 반드시 이것을 기록하려고 한 이유는 곧 그것을 잊지 않고자 한 것"이라고 썼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복수하려는 건가"라고 물으면
"일본에 대해선 은혜만 있고 원망은 없다"며 양국의 화해를 역설했다.

통신사들조선으로 돌아갈 때면 일본 문사들이 마중 나와 석별의 눈물을 뿌렸다.

'일본에서 배우자'는 움직임도 일었다.
강항은 농민과 사무라이를 분리해 군사력을 키운 일본처럼
조선도 병농(兵農)을 분리해 직업군인을 양성하고 오랜 기간 복무하는 구임(久任)제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조선순환보직제가 지방관의 착취를 조장한다며
일본처럼 한 직책을 오래 맡게 하거나 종신제를 도입해 책임행정을 구현하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일본이 부유하고 군사력이 강해진 것은 능히 외국과 교통하기 때문"이라며
일본을 본받아 통상에 나서야 한다고 썼다.

저자는 이런 제안들이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책을 읽으며 역사의 반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성 여름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동군(東軍)에 패퇴한 도요토미 세력은
절치부심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막부를 무너뜨렸다.

사쓰마(현재의 가고시마)와 조슈(야마구치), 두 번(藩)이 주축이 된 메이지 정부는 끝내 조선을 집어삼키고 그간의 화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지금도 일본 정치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아베 총리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일본의 욱일승천을 외치는 그들에게 에도 시대의 화해정신을 배우라고 권하고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06/20181006000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