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북송사업 被害, 김정은 정권에 손배소 낸 가와사키 에이코 인터뷰
재일교포 9만여 명이 조총련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북한으로 넘어갔던 '북송(北送) 사업'.
역사책 한구석에 묻혀 있는 이 사실을 일본 안팎에 환기시키며
북한에 책임을 묻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일본인'이 있다.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갔다가 43년 만에 탈북(2003년)한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76)씨.
그는 지난달 비슷한 처지의 탈북자들을 모아 김정은 정권 앞으로 총 5억엔(약 5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냈다.
그를 이달 3일 도쿄 도심에서 가까운 키바(木場)에서 만났다.
―언제 북한에 건너갔나.
"1960년 교토의 고교 3학년 때 혼자 갔다.
당시는 조총련 세력이 강했고, 재일교포들이 대부분 북한에 가는 분위기였다."
"부모님이 곧 뒤따라 온다고 해서 나 혼자 갔다.
―북한에서 어떻게 43년을 견뎠나.
"북한 체제는 내가 찬성할 수도 없고, 협력할 수도 없는 나라였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북에 가족이 있나.
"1987년에 사망한 남편을 만나 1남 4녀를 뒀다.
―북한은 어떤 체제였나.
"완전히 이중적인 체제다.
―원래 직업 외에 무슨 일을 했나.
"일본에서 북한으로 온 '귀국자'가 굶어 죽는 것도 봤다.
―한국의 일부 세력은 1990년대 후반 북한의 대기근이 과장됐다고 말하는데.
"현장에서 내가 봤다. 500만명 이상 굶어 죽었다고 본다.
―지금 국적은 왜 일본인가?
"2004년 일본에 온 후 2007년 지금의 국적을 가졌다.
입국 당시 일본 법무성 공무원에게 일본 국적을 갖겠다고 했다.
그래야만 법적으로 차별을 받지 않고 북한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탈북자가 북송 사업을 벌였던 조총련을 상대로 2009년 소송을 제기했지만
시효(時效) 등의 문제로 기각됐는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일본 정부는 자국 국민에 대한 보호 책임이 있다.
2015년 일본 변호사 협회에 나 같은 사람을 도와 달라는 구제 신청을 내고, 이번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래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은데.
"일본 정부도 협조해서 북송 사업이 시작됐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번 소송의 쟁점은 일본의 재판권이 외국 정부에 미치는지와 시효가 성립되는지 아닌가.
"일본에서도 많은 언론이 보도해 북송 사업의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많은 변호사가 함께하고 있다. 국제적 소송도 병행하고 있다."
―어떤 소송인가.
"올해 2월 네덜란드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북한의 김정은과 허종만 조총련 의장을 제소해서 진행 중이다.
미국의 움직임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무슨 움직임인가.
"북한에서 고문당한 후, 귀국했다가 숨진 웜비어의 부모가
얼마 전 미국에서 북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나. 일본도 가만히 있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는 북한에 17개월간 억류됐다가 작년 6월 혼수상태로 귀국한 지 6일 만에 숨졌다.
그의 부모는 미국이 지난해 북한을 다시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것을 법적 근거로 삼아
A4 용지 22장 분량의 소장을 워싱턴 DC의 연방지방법원에 냈다.
―일본 법원이 북한 정권에 유죄 판결을 내리고,
북한으로부터는 손해배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일본엔 조총련이 있고 165개 국가에 북한 재산이 있다.
해외의 북한 재산을 압류하면 되지 않겠나."
―지금 남한과 북한은 화해 분위기인데.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북한을 믿지 않는다.
김정은이 지금 대화에 나온 것은 북한 백성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유엔의 제재가 자신들의 사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외국 제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러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북한이 어려울 때 문재인 대통령이 계속 러브콜을 보내자,
당 간부들이 '남조선을 이용하자'고 해서 시작된 게 이번 국면의 본질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독재 체제가 어울릴 수 있나."
가와사키씨는 아직도 북한에는 자녀가 남아 있다며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중간중간 가족들이 생각나는지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이 이뤄질 수 있을까.
北정권은 노동력·재력을 탐했고, 日정부는 불만세력 한국인을 내보낼 기회
국가적 사기극 '북송사업 25년'
일본과 북한 간에 25년간 진행된 '북송 사업'은 내년에 60주년을 맞는다.
이 사업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가적 사기극이었다.
북송된 9만3340명은 최소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차별대우에 시달렸다.
이중엔 일본 국적자도 6000여명 있었다.
북송 사업이 시작될 당시 김일성 북한 정권은 재일교포의 노동력과 재력을 필요로 했다.
재일교포를 흡수해 한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 정부로선 대부분 일본 강점기에 끌려와 불만을 가진 한국인을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조총련이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선전하며 사업에 앞장섰다.
일본에서 차별 대우를 받던 재일교포들은 앞다퉈 북송선을 탔다.
한국 정부는 당시 외교력을 총동원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1959년 12월 '귀환선'이 처음 니가타현의 니가타항을 출발할 당시에는 소련 선박 두 척이 동원됐고
5만여 명이 모여 북송 사업을 축하했다.
이후 만경봉호가 니가타항과 청진항을 오가며 재일교포를 실어 날랐다.
북송된 재일교포들의 참담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비판이 제기됐으나
이 문제가 일본 정부 차원에서 표면화된 적은 거의 없다.
일본 정부는 북송 사업의 파장 확대를 극도로 경계해왔다.
일각에서는 북·일 관계 개선 시,
북송 사업으로 건너갔던 재일교포의 일본 국적 가족 문제가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