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아관파천 길' 이달 개방
문화재청이 8월 한 달간 '고종(高宗)의 길'을 시범 개방한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120m로,
1896년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의 경로로 추정되는 길이다.
당초 이 길을 복원한다고 발표했을 때
"무슨 대단한 문화유산이라고 그런 것까지 되살리느냐"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경복궁에서 왕비의 피살을 겪은 임금이 외세에 빌붙어 살아남기 위해 체면도 벗어던진 채
궁녀 가마에 몰래 타고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달아난 굴종적인 사건이 아관파천인데,
그게 무슨 자랑스러운 역사냐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종은 겉으론 어수룩하게 보이면서도 속으로 주도면밀하게 칼을 가는
'삼국지'의 유비형(型)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밝혀진 자료들을 보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자주(自主)를 추구하려던 고종의 노력이 많이 드러난다.
고종은 은밀히 의병 세력에 항일을 독려했고,
숱한 외국 열강들에 밀서를 전해 일본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반면 특정 정치세력과 결탁한 '황제'가 민(民)을 직접 지배하고 수탈하려는 시대착오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바로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이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당대 대중의 인식을 반영하는 매체가 영화라면,
한국영화에서 묘사된 고종의 모습도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변화했다.
19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 남궁원이 맡은 고종은 주색에 빠진 채
"난들 좋아서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겠느냐"고 푸념하는 무능한 군주였다.
그러나 2012년 '가비'에서 고종 역을 맡은 박희순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치욕스럽다 해도 나는 살아서 황제가 될 것이다"고 비장하게 부르짖으며
대한제국 수립을 추진하는 의지의 인물로 나온다.
고종의 진짜 모습은 '남궁원'과 '박희순' 사이 어디쯤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