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의 어프로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체인지메이커들의 아지트 '헤이그라운드' 1주년…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
100억은 자기 재산이지만 1000억은 사회가 맡긴 거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이다
현대해상화재 회장의 외아들 후계자는 6년 넘게 딴짓 중이다
까닭 모를 분노와 조롱, 혹은 터무니없는 아부의 과녁이 됐던 이 재벌 3세 청년의 이름은 정경선(32).
그의 직함은 비영리법인 루트임팩트의 최고상상책임자이자 사회적 기업에 투자하는 HGI의 대표.
HGI의 2017년 회계상 자본금은 65억원, 투자한 소셜벤처는 13개사다.
신축 건물의 엘리베이터인데도 강한 인내심을 요구했다.
―그런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하나.
"여러 번 받는 질문이다.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청운중·경복고 등 공립 중고를 다녔다. 다른 재벌 3세들은 유학을 많이 갔는데.
"현대가에서는 이 트랙(경로)을 선택한 분들이 많았다.
―읽은 책을 수치로 묻는다면.
"고등학교 때 집에 내 책만 한 2000권 있었다.
―재벌 3세도 친구들이 괴롭히나.
"남자 중학교는 정글이다. 남중생은 선생님도 경찰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문학을 꿈꿨다면서 고려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사실은 고3 때 수시전형으로 연세대 국문과에 먼저 붙었다.
―(웃으며) 바른 생활 소년이었다.
“(웃으며) 어머니가 그때 얘기 가끔 한다. ‘네가 나이 들어 말 안 들으려고 그때 듣는 척했던 거구나’
‘말 잘 듣던 착한 아들’에게 터닝포인트가 찾아온 건 2006년 가을이었다.
그때까지 정경선은 내가 먼저 선의로 대하면, 상대방도 선의로 갚는다고 믿었다.
개인을 넘어 제도화된 선의랄까.
―루트임팩트의 시작과 후원은.
“저를 예뻐해 주시는 사촌 누나들이 있다. 이노션의 정성이 고문님과 현대 커머셜의 정명이 부문장님.
(현대차) 정몽구 회장님의 큰 따님과 둘째 따님이다. 명이 부문장님 남편이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님이고.
대학교 다닐 때도 좋은 일 하는 동아리 만들려면 돈이 좀 필요하다고 엄청 끈덕지게 괴롭혀 드렸다.
그분들이 도와주신 돈과 제가 모아놨던 돈이 대략 3억3000만원, 아버지에게 1억원, 대략. 그렇게 시작했다.”
―사촌은 모두 몇 명인지 궁금해졌다.
“(손가락으로 헤아리며) 친사촌만 20명. 같은 항렬의 6촌까지 합하면 한 40명 될 것 같다.”
20년 전인 1998년 6월,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었을 때 정경선은 초등학생이었다.
다른 사촌들과 함께 판문점까지 따라가 할아버지를 응원했다고 한다.
20명 중 한 명이던 초등생 경선의 얼굴을 할아버지는 구별하지 못했고, 경선이 중학교 때 세상을 떠났다.
2015년은 정주영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
그때 한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후손 중 한 명에게 내레이션을 부탁했고, 그가 선택됐다.
“본의 아니게 할아버지 삶의 궤적을 쫓게 됐다.
한국 지역사회교육협의회라는 비영리법인이 있다.
지역 교사들이 미국의 쇠락한 탄광 도시를 재생시킨 영화가 있었는데,
그걸 보고 감명받아 만든 조직이라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초대 이사장이었고, 그렇게 바쁘면서도 이곳 이사회는 꼬박꼬박 참석하셨다고 한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나는 자본가가 아니라 부의 청지기다.
개인이 100억원을 가지면 자기 재산일 수도 있지만, 1000억원이 넘어가면 그 사람 재산이 아니다.
사회가 그에게 맡긴 거다.’
할아버지를 잘 몰랐는데, 그때 많이 놀랐다.
직접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틀리지 않는구나, 그 믿음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주셨다.”
―같은 또래 재벌 3세들은 정 대표와 정 대표 프로젝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가 공립학교를 나왔지 않나.
그때는 잘 몰랐고, 요즘 사회에 나오고 나서 더 많이 만나는 것 같다.
나를 안 좋아하는 분들도 있다고 하더라. 가식적이라고.
하지만 그런 분들은 적은 것 같고, 많은 분이 지지해 준다.
‘너 같은 애가 더 많아져야 한다’ ‘나도 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못하게 한다. 부럽다’ 이런 이야기도 들리고.
남들 몰래 우리 HGI에 투자한 다른 그룹 ‘형님’도 있다.”
―설립 이후 6년이다. 루트임팩트와 HGI의 현재는.
“루트임팩트는 체인지 메이커를 발굴하고 교육하며 생태계를 조성한다.
물론 돈이 들지만, 2018년 예산의 45%는 이 헤이그라운드 멤버십 수익 등으로 가능해졌다.
45%는 현대해상과 아버지 후원금이다. 나머지 10%는 해외에서 후원한다.
JP모건과 구글, 그리고 샤넬재단이 우리 프로젝트 취지에 공감해줬다.
HGI는 임팩트 투자 시작한 지 3년 정도 됐다.
13개 소셜벤처에 투자 중인데, 벌써 주식 평가 가격이 두 배 이상 오른 곳이 적지 않다.”
―단순히 자선이나 기부가 아니라, 사회적 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도 될 수 있을까.
“한국을 흔히 정답 사회라고 한다. 목표로 향하는 길도 하나, 성공하는 방법도 하나, 정답만 있는 사회.
7080의 산업화 시대에는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계 생산성이 노동 생산성보다 높아지고, 정보화 시대가 된 지금은 다르다.
유연하게 사고하고 혁신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이런 시대에는 사회적 기업이 솔루션(해결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험회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내게 행운이다.
보험회사는 원래 사회안전망, 비영리 사회적 기업과 함께했을 때 가장 시너지 효과가 크다.”
―구체적으로.
“보험회사는 수백 년 동안 수익 구조가 바뀐 적이 없다.
이러이러한 보험을 만들어도 결국에는 사람들이 사줘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고객의 불편을 미리 해결하는 보험회사만 살아남을 것이다. 의료와 건강이 대표적이다.
병이 걸리면 돈이 든다. 그렇다면 병을 사전에 예방하면 어떨까.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선제적으로 개선한다면.
(미국 최대 생명보험사인) 메트라이프도 이미 루멘랩이란 조직을 만들었다. 프루덴셜도 마찬가지.
미국에서 도시 재생 투자를 많이 한다. 빈곤이 대물림될수록 범죄도 많이 발생하고, 질병도 많아지니까.
이는 결국 보험사의 지출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들 삶의 질을 높이면 보험사의 손실은 줄어든다.
트럼프 사위인 쿠슈너 집안에서 만든 오스카(Oscar)라는 건강보험 스타트업이 있다.
(손목 밴드형) 웨어러블 기기를 차고 운동 목표를 달성하면 보험료를 깎아준다.
가입자들이 건강하고 행복할수록 보험사도 실제 돈을 번다.
나는 이게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서 시대정신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뭐라 하시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며 끄덕이시더라(웃음).”
―‘외아들 후계자’의 계획은.
“아버지는 1대 주주지만, 지분은 22%에 불과하다. 내가 절차를 거쳐 상속을 받는다면 지분이 10%나 될까.
정말 원 오브 뎀, 주주 중 한 명에 불과할 거다.
지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루트임팩트와 HGI다.
나를 위해서도 현대해상을 위해서도 지금 이걸 열심히 잘하는 게 책임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회사가 현대해상의 양적이고 질적인 성장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현대해상 주주들과 구성원들에게 인정받는 후계자가 되고 싶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했다.
성공하고 많이 가졌으니까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안 그래도 이 일을 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그럴 자유와 여유가 있으니 더 열심히 한다는 것.
전술했듯, 현대해상의 자산은 40조원, HGI자본금은 65억원이다.
같은 잣대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겨우 600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회사.
하지만 이 선의의 청년에겐, ‘딴짓’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이 주력이고 핵심이다.
헤이그라운드의 1층 엘리베이터 문이 마침내 열리고, 청년들이 쏟아져 나왔다.
‘헤이’라며, 그들이 경쾌하게 웃었다.
비영리법인 루트임팩트(rootimpact.org)
: 사회 혁신과 변화를 꿈꾸는 체인지 메이커의 발굴·교육·인프라 지원
HGI가 투자한 사회적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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