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물상] 어느 수목장
조선일보
입력 2018.05.23 03:16
베스트셀러 '그리스·로마 신화'를 쓴 작가 이윤기는 경기도 양평 작업실 부근에 나무 500그루를 심었다.
매년 5㎝씩 자라는 나무가 경이로웠던 모양이다.
그는 "나무는 '시간'에 다는 방울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나무를 심으며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렸다. 숲 가꾸는 일이 그만큼 즐거웠던 것이다.
2010년 이윤기는 양평 숲속에서 수목장으로 세상과 이별했다.
조문객들은 그가 번역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영화음악을 틀어놓고
조르바춤을 껑충껑충 추며 고인을 추모했다.
▶수목장은 2004년 임학자 김장수 고려대 명예교수의 장례가 관심을 촉발했다.
김 교수는 일생을 바친 숲과 나무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평소 아끼던 50년생 참나무 아래에 묻혔다.
이후 화장한 유골의 골분(骨粉)을 나무나 화초, 잔디 아래 묻는 자연장이 급증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경북 명문가에서도 수목장이나 자연장으로 집안 장례를 치르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장례가 어제 경기도 곤지암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유난히도 숲과 나무를 좋아하던 고인이었다. 결국 평소 아끼며 즐겨 보던 그 나무 아래에 묻혔다.
풍수 좋은 널찍한 명당에 번듯하게 봉분과 비석을 세워도 별스럽게 보이지 않을 법한데,
구 회장은 땅 한 평 차지하지 않고 숲으로 돌아갔다.
장례도 조문이나 조화도 받지 않고 3일간의 가족장으로 치렀다.
허례허식투성이인 장례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고인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구 회장이 누운 곳 인근엔 고인이 만든 화담숲이 있다.
잣나무·벚나무와 백합·미나리아재비 등 식물 4300종,
천연기념물 327호 원앙과 뻐꾸기·박새 등 조류 25종이 어울려 사는 생태 공원이다.
고인이 지난 2006년부터 경기도 곤지암에 41만평 규모로 조성했다.
봄가을이면 형형색색의 꽃과 단풍으로 물든다. 1년에 두 번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 경이로운 체험이다.
구 회장이 우리 사회에 남긴 선물이다.
▶'말단 직원에게도 존댓말 쓴 회장님' '의인(義人)을 도와주는 기업인' '작은 약속도 소중히 여기던 분'….
구 회장에 대한 추억담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고인이 기업만을 남겼다면 이런 추모 열기는 없었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소탈하게 살다 그렇게 간 사람의 향기가 사회에 퍼지는 것 같다.
"메뚜기 이거 한번 먹어보소. 맛있어요" 하며 웃던 고인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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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72] 쪼끔 촌스러운 회장님
조선일보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입력 2018.05.22 03:11
오래전 LG 임직원 전체 특강을 한 적이 있다.
1시간 반에 걸친 강연에서 나는 왜 LG가 죽었다 깨어나도 삼성을 이길 수 없는지에 대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그 얼마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에 LG 로고를 달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일 등을 예로 들며
선뜻 저지르지 못하는 소심함과 어딘지 모를 2% 부족함에 대해 난타를 퍼부었다.
강연을 끝내고 맨 앞줄에 앉아 계신 구본무 회장님께 다가가 인사를 드렸는데
회장님은 뜻밖에도 내게 시간 여유가 있으면 회장실에서 차 한잔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날 나는 거의 1시간가량 회장님과 번갈아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밤섬의 새들과 자연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기업 회장님이라기보다 동네 복덕방 영감님 같았다.
국립생태원장 시절에는 회장님 초청으로 화담숲에서 저녁을 함께한 적이 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밤에도 회장님은 말씀으로 내게 그 어떤 가르침도 주시지 않았다.
그저 편안하게 세상 얘기를 나눠 주셨을 뿐이다.
내 책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에서 밝힌 대로 난생처음으로 CEO가 된 내게는 몇 분의 롤 모델이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닮고 싶어 했고 실제로 흉내 낸 모델이 바로 구본무 회장님이었다.
나의 '경영 십계명'의 상당수가 구 회장님을 지켜보며 배운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삶의 업보'라고까지 얘기한
소통을 위해 개발한 '원·격·바(원장이 격주로 구워주는 바비큐)' 역시 회장님께 얻은 지혜다.
무사히 원장 일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뒤 마치 스승님을 찾아뵙는 마음으로 회장실에 연락을 드렸다가
거의 잡상인 취급을 당하는 바람에 포기했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시다니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어딘지 쪼끔 촌스러우셨던 회장님과 달리 최근 LG의 가전제품들과 광고는 날로 세련미를 더하고 있다.
당장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도 경영'의 신념을 꺾지 않으셨던 회장님의 유산이 드디어 빛을 보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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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인간 구본무
조선일보
입력 2018.05.21 03:16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어린 시절 진주의 조부모 집을 오가며 자랐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물 동냥 왔다가 소년 구본무와 마주쳤다.
스님은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허, 저기 돈 보따리가 굴러다니네."
부자들로 넘쳐나는 재계에서도 그의 얼굴상은 으뜸으로 쳐줬다.
허영만의 만화 '꼴'에서도 돈이 따라붙는 만석꾼 관상으로 등장한다.
▶스님의 관상풀이대로 구 회장은 평생을 돈 보따리를 끌어안고 살았다.
하지만 일상은 남을 먼저 배려하는 소탈한 에피소드로 넘쳤다.
무조건 20분 전엔 약속 장소에 나가는 습관이 유명했다.
먼저 와 있는 구 회장을 보고 상대방이 황송해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음식점 종업원에겐 만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손에 쥐여주곤 했다.
골프장에 가면 직접 깃대를 잡고 공을 찾아다니며 캐디를 도와주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반말하는 법이 없었다.
옳은 일 한 의인(義人)이 나타나면 개인 재산을 털어 도와주었다.
LG 의인상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유교적 가풍(家風)을 이어받은 경영자였다.
온화한 가부장 같은 리더십으로 직원들 마음을 샀다.
10년 전 금융 위기 때 그가 내린 지시가 화제였다.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휴대폰 사업이 거액 적자 냈을 때도 LG전자는 감원 없이 버텼다.
덕분에 그의 회장 취임 후엔 노사 분규가 거의 사라졌다.
직원들 애사심도 유별나다. 투박하지만 끈끈한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그는 평생 책을 딱 한 권 기획해 펴냈다. '한국의 새'라는 조류 도감이다.
그의 탐조(探鳥) 취미는 유명했다. 여의도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틈만 나면 한강변 철새들을 관찰했다. 새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것일까.
그는 바람에 순응해 하늘을 날듯 순리를 좇는 삶의 방식으로 일관했다.
남과 다툴 일을 만들지 않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흔한 비리나 구설수 한번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다.
▶천하의 덕장(德將) 구 회장도 분노를 참지 못한 일이 있었다.
IMF 때 강제 '빅딜'로 반도체 사업을 빼앗겼을 때다.
그날 밤 구 회장은 "모든 것을 버렸다"며 통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일어섰다.
기업인이 존경받지 못 하는 오늘,
정말 옆집 아저씨 같던 재계 총수를 떠나보내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낄 사람이 무척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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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의인상·상록재단… "베풀며 살아라" 어머니 뜻 평생 지켰다
전수용 기자
[구본무 회장 별세] 구본무 회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를 실천해온 대기업 오너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은 더 이상 속일 데가 없다"면서 정직을 강조했다.
고인은 물론 LG그룹도 불미스러운 구설에 오른 적이 거의 없었던 것도
고인이 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기업 경영에서 '정도(正道)'를 실천한 결과다.
"편법·불법을 해야 1등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을 안 하겠다"는 게 고인의 지론이었다.
구 회장은 LG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 과정에서는 '냉철한 승부사' 기질을 보였지만,
평소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반한 온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신용을 쌓는 데는 평생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을 자주 했던 고인은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꼭 지켰다.
공식 행사든 사적 약속이든 늘 20~30분 정도 먼저 도착, 상대방을 기다린 것으로 유명하다.
고인은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승용차가 갓길을 운행하거나 적당히 위반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직원을 아낀 인재 경영은 고인의 철칙 중 하나였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규모 적자가 났을 때도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면서
인위적 감원을 하지 않았다. 고인이 취임한 뒤 LG그룹에서는 '노사 분규'라는 단어가 생소해졌다.
그는 협력업체 대해 "우리는 '갑을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권위주의와 담을 쌓고, 검소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대기업 총수에 대한 편견을 바꿨다.
연세대 재학 중에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보병으로 만기 전역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저녁 자리가 늦어지면 운전기사를 먼저 보내고,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하기도 했다.
큰딸 연경씨나 아들 구광모 LG전자 상무의 결혼식도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치렀고,
LG 경영진에게도 '작은 결혼식'을 권했다.
신문에 회사 직원들이 부고 내는 것도 금지하고, 협력업체에서는 경조금도 받지 못하게 했다.
LG 고위 인사는 "아랫사람 누구에게도 반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불필요한 격식도 싫어했다.
주요 행사에 참석하거나 해외 출장 때 비서는 꼭 필요한 한 명만 수행하도록 했고,
주말에 있는 지인의 경조사 등 개인적인 일을 할 때는 비서 없이 혼자 다녔다.
LG그룹이 매년 여는 인재 유치 행사에서 400명이 넘는 참가 학생 모두와 일일이 악수를 하고,
'셀카' 요청에도 흔쾌히 응하며 격의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구 회장은 2016년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서는 '소신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당시 '앞으로도 (박근혜 정부 때처럼) 명분만 맞으면 정부 요구에 돈을 낼 것이냐'는 국회의원 질문에
"불우이웃을 돕는 일은 앞으로도 지원하겠다"고 했고,
'앞으로도 이런 자리(대통령 면담)에 나올 것이냐'는 물음에는
"국회가 입법으로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질문자였던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청문회장에서 만난 그분은 이 시대의 큰 기업인이었다"고 했다.
고인은 "남들에게 베풀고 살라"는 어머니 고(故) 하정임 여사의 뜻을 평생 실천했다.
"국민이나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면 영속할 수 없다"면서 LG복지재단, LG연암문화재단, LG연암학원 등
복지·문화·교육 분야 공익재단 이사장 및 대표이사로 사회 공헌 활동에 투자와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고인은 특히 2015년 "세상이 각박해졌어도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희생한 의인(義人)에게
기업은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해야 한다"며 'LG의인상'을 만들었다.
그동안 소방관·경찰관·고교생·크레인 기사·선장 등 72명이 의인상을 받았다.
작년 강원도 철원에서 빗나간 총탄에 아들을 잃고도
"어느 병사가 총을 쐈는지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고 한 아버지나,
2015년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사고를 당한 병사는 사재를 내어 도와줬다.
새와 숲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고인은 "후대에 의미 있는 자연유산을 남기고 싶다"면서
1997년 12월 국내 최초로 환경 전문 공익재단인 LG상록재단을 세웠다.
공익사업으로 경기도 곤지암에 5만여 평 규모의 '화담숲'을 조성해 수목 보전과 연구 지원에 힘썼다.
화담숲의 '화담(和談)'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으로, 구 회장의 아호(雅號)이다.
새 울음을 듣거나 날아가는 모습만 보고도 새 이름을 척척 맞혀 '새 박사'로 통했다.
LG 트윈타워 빌딩 집무실에 대형 망원경을 설치해 여의도 밤섬 새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2000년 조류학자들과 함께 국내 최초의 조류도감인 '한국의 새'라는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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