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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는 스님 (진유정, 조선일보)

colorprom 2018. 5. 22. 17:30

[일사일언] 내 친구는 스님

조선일보
  • 진유정 카피라이터
    •       
    입력 2018.05.22 03:01

    진유정 카피라이터
    진유정 카피라이터


    스님은 건널목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초여름 까슬까슬한 천으로 지은 회색 승복에 왜소한 몸이 다 가리는 커다란 밀짚모자 차림의 스님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산속 절이 아닌 도시 절에서 우리는 채소를 송송 썰어 빚은 만두를 먹고 물을 똑똑똑 떨어뜨리며
    오랜 시간 내린 커피를 마셨다.
    그제야 머리를 깎은 스님 모습에 조금은 적응되었다.

    스님은 나의 대학 친구다.
    나와 생일이 같고 잘 웃고 다정하며 마음이 여린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다녔다.
    어느 해인가에는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기도 했다. 그때 나는 광고 회사를 다녔다.
    우리는 학교에 다닐 때보다 졸업 후에 더 가까워졌다. 서로 생각을 나눴고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러다가 나는 베트남으로 떠났고 친구는 출가했다. 10년이 훌쩍 넘도록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봄소식'이라는 고운 메일 주소를 기억한 덕분에 겨우 소식이 닿았고, 그렇게 다시 만났다.

    우리는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때가 되어 인연이 합함'이라는 불가(佛家)의 단어가 그날 이후 마음속 깊이 남았다.

    만날 때가 되어 만나게 됐지만 그 시절이 지나가면 다하기도 하는 인연.
    지금 곁에 있다고 영원히 있는 것도, 지금 없다고 또 영원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은 시절인연과 비슷한 것 같지만 어쩌면 반대편에 있을지도 모른다.

    타이밍이 뭔가를 얻는 기회나 시간을 열렬히 기다린다면
    시절인연은 인연을 억지로 잡아두지 않고 그저 물 흐르듯 놓아둔다.

    [일사일언] 내 친구는 스님
    스님을 만난 지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 뒤에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좋다. 20대라는 생의 한 시절을 함께 건너온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으니.
    스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시절인연이 한 번 더 닿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
    그때까지는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며 살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