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3.16 03:04
[정경유착 파헤치던 27세 기자 피살 20일만에… 총리 사퇴 선언]
마피아·총리 측근 유착 내용 담긴 미완성 기사 동료들이 사후 게재
시민들 분노… 5만명 거리로 나와
결국 10년 집권하던 총리 낙마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동쪽으로 65㎞ 떨어진 작은 마을.
27세의 젊은 기자 잔 쿠치악이 자택에서 가슴에 총을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바로 옆에는 여자친구 마르티나 쿠츠니로바가 머리에 총을 맞고 숨져 있었다.
둘은 5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쿠치악은 정치인과 결탁한 기업인들의 탈세를 집중적으로 취재한 탐사보도 전문기자였다.
작년부터는 슬로바키아 정권 핵심부와 이탈리아 3대 마피아 중 하나인 은드란게타와의
검은 유착관계를 밝히는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쿠치악이 일하던 온라인 매체 악투알리티(뉴스라는 뜻) 동료들은
쿠치악이 일하던 온라인 매체 악투알리티(뉴스라는 뜻) 동료들은
그의 죽음이 취재하던 사안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쿠치악의 컴퓨터에 들어 있던 유작이 된 미완성 기사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내보냈다.
기사에는 로베르토 피코 슬로바키아 총리의 측근들이 은드란게타와 결탁한 이탈리아 사업가와 짜고
슬로바키아가 EU로부터 받는 보조금을 빼돌린 정황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안토니오 바달라라는 이탈리아 사업가가 과거 동업을 한 사이였던 수퍼모델 출신 여성
안토니오 바달라라는 이탈리아 사업가가 과거 동업을 한 사이였던 수퍼모델 출신 여성
마리아 트로츠코바(31)가 2015년 피코 총리의 수석보좌관으로 임명된 뒤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바달라는 트로츠코바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소유한 농업 기업의 농사 규모를 부풀려
정부의 농업 보조금을 800만유로(약 105억원)가량 빼돌렸다.
이외에도 바달라가 갖가지 세금을 덜 낼 수 있도록 트로츠코바가 국세청에 영향력을 행사한 정황이
쿠치악의 미완성 기사에 담겨 있었다.
여당인 SMER-SD당 간부들이 바달라에게 사업 편의를 제공한 사실도 들어 있었다.
쿠치악의 죽음과 기사 내용에 분노한 시민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쿠치악의 죽음과 기사 내용에 분노한 시민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지난 10일에는 브라티슬라바에 5만명이 집결해 피코 총리의 사퇴를 요구했다.
옛 소련에 민주화를 요구하던 1989년 이후 28년 만의 최대 규모 집회였다.
민심이 들끊자 12일
민심이 들끊자 12일
피코 총리의 오른팔이자 쿠치악이 '악의 축'으로 지목한 로베르토 칼리나크 내무장관이 사임했다.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13일 슬로바키아 의회가 피코 총리에 대해 불신임 투표를 실시하기로 하자,
피코 총리는 14일 전격적으로 "총리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한 젊은 기자의 끈질긴 취재가 10년째 장기 집권한 권력자를 무너뜨린 것이다.
피코 총리는 2006년 이후 2010~2012년만 제외하고 10년째 집권 중이었다.
쿠치악은 2015년부터 악투알리티에서 일했다.
쿠치악은 2015년부터 악투알리티에서 일했다.
독일 미디어그룹 악셀 스프링거가 소유한 매체다.
그는 권력형 탈세 비리를 파헤치는 탐사보도 전문기자였다.
그는 권력형 탈세 비리를 파헤치는 탐사보도 전문기자였다.
특히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고 퍼즐 맞추듯 이어가는 '데이터 취재'의 달인이었다.
거악(巨惡)을 파헤치다 보니 쿠치악은 협박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사망하기 2주 전쯤인 지난달 9일에는 슬로바키아 재벌 마리안 코크너가 호화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거액의 세금을 탈루한 정황을 보도했다.
취재 과정에서 코크너는 쿠치악에게 가족의 신상을 거론하며 협박했으나, 쿠치악의 보도를 끝내 막지 못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피코 총리의 장기 집권에 슬로바키아 국민의 피로감이 쌓이던 상황에서
파이낸셜 타임스(FT)는 "피코 총리의 장기 집권에 슬로바키아 국민의 피로감이 쌓이던 상황에서
쿠치악의 죽음이 분노를 표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보도했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