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잊힌 전사자 없도록…" 90세 老兵 마지막 전투
입력 : 2018.01.06 03:02
[전현석 기자의 觸(촉)]
6·25 승전비·추모비 건립 활동…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별, 못단게 아니라 안단 것… 함장이 총장보다 신나게 싸울 수 있으니까"
"대한민국을 지켜달라" 장사동상륙작전 '문산호 영웅들'
민간인 선장·선원 명단 찾는데 일조… 전사자 동상을 각 모교에 세우기도
아흔 살 노병(老兵)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은 "내가 바다 인생 90년이다!" 외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후 2시간30분 동안 쉼 없이 혼자 말했다.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참전했던 6·25 해전, 휴전 후 고속 간첩선 나포 작전, 해양소년단 고문(顧問) 활동과
300회 넘는 안보 강연, 승전비·추모비 건립 운동에 대해 원고 없이 쉼 없이 말했다.
웅변하다, 호통치다, 눈물 흘렸다. 그러다 가쁜 숨을 토해냈다.
"아이고, 기계가 90년 이상 쓰니까 다 낡았어. 숨차고, 허리 아프고, 관절이 다 그래."
―이제 질문해도 되나요?
"아이고, 시작합시다."
―하실 말씀이 많으셨나 봅니다.
"이게 내 유언입니다."
―유언이요?
"맥아더가 얘기한 것처럼 나도 이제 사라질 때가 됐어요. 이런 기회에 유언을 남겨야 해요.
바다는 대한민국 성벽이자 젖줄
지난달 29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큰아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바다 도서관 같네요.
"국가 안보 도서관이기도 해요. 학생·교사·군인을 상대로 제대로 강연하려면 항상 공부해야지."
그는 1994년부터 해양소년단 고문으로 활동하며 청소년 단원과 학교장에게 강연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몇 차례 강연하셨나요?
"300회쯤 됩니다. 몇 해 전만 해도 매년 수 차례씩 했는데, 이제는 힘이 들어서 자주 못하겠어요."
―지금도 2시간 넘게 쩌렁쩌렁 말씀하셨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얘기할 때는 어디서 힘이 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어떤 내용을 강연하시나요?
"세 가지입니다.
―바다 예찬론자시군요.
"우리나라는 바다의 나라입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바다는 또 어머니의 품속입니다" 했다.
부산 구한 대한해협해전 영웅
최영섭은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 북한 공산당을 피해 온 가족이 월남했다.
"북한 앞날 싹수가 노랗게 보였어. 소련군이 마을에 들어왔는데 강도·강간을 일삼았어.
손목시계 뺏어서 한쪽 팔에 열 개 넘게 차는 놈들도 있더라고."
그는 1947년 9월 해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했다.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바다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6·25 발발 4개월 전 소위로 임관해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로 부임했다.
"백두산함이 어떤 군함이냐.
당시 우리 해군에 포 달린 군함이 없었어요.
일본이 버리고 가거나 미군이 쓰던 작은 소해정 몇 척이 전부였어요.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 '나라에 돈이 없다. 우리끼리라도 돈을 모으자' 해서
전 해군 장병이 월급에서 5~10%씩 냈어요. 해군 부인들도 빨래, 뜨개질, 바자회로 돈 벌어 보탰고.
이렇게 모은 성금이 당시 돈으로 852만원(1만8000달러)입니다.
이걸 손 제독한테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부끄럽기 한이 없구나' 눈물 흘리면서 4만5000달러를 보태줬어요. 그 돈으로 미국 가서 사 온 전투함이 백두산함입니다.
원래 미국에서 붙인 이름은 '화이트 헤드 소위(Ensign White Head)'.
백두(白頭)와 화이트 헤드가 공교롭게도 같은 건 우연이었을까요, 운명이었을까요."
그가 탄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26일 동해 부산 동북 쪽으로 기습 침투하려던 북한 무장 선박을 격침했다.
대한해협해전으로 명명된 이 전투는 6·25 최초 해전이자 승전이었다.
당시 북한 선박에는 북한군이 최소 600명 승선해 있던 것으로 추정됐다.
미국 전사(戰史) 학자 제임스 필드는 '미국 해군 작전의 역사: 한국전' 책에서
"부산항은 당시 남한에 군수 보급품과 증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로
적 600여명의 무장 상륙군을 수장시킨 건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밝혔다.
만약 이때 부산항이 북한군에 기습당했다면 전쟁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장전수 전병익, 조타사 김창학이 적 포탄에 맞고 쓰러졌어.
병사 식당에서 수술하는데 '적함은요?' 묻더라고.
'적함은 격침됐어. 이겼어. 정신 차려! 살아야 돼' 고함쳤어.
그러니까 '대한민국…' 말을 못 마치고 고개를 떨궜어.
내 귀에는 '대한민국을 지켜다오'로 들렸어. 내 귀엔 그렇게 들렸다고!"
'사냥터로 간다' 간첩선 나포
그는 제1·2 인천상륙작전 등 6·25 주요 해전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6·25 이후에는 해군 최초의 구축함인 충무함(DD―91) 2대 함장에 취임했고,
1965년 3월 동해상에서 고속 간첩선을 나포하고 간첩 8명을 생포했다.
충무함 함장으로 마지막 출동 임무에서 거둔 성과였다.
그는 당시 함대사령관에게 "간첩선을 잡아오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첩보라도 입수했던 건가요?
"아니요.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판단했어요."
―직감이요?
"적이 우리 작전 계획 내용을 다 파악하고, 암호 해독해서 우리 함정 위치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작전 해역을 새로 짰어요.
우리 함정과 본부 사이에 통신이 감청 당해도 우리 배 위치를 알 수 없게 암호도 새로 만들고요.
출항할 때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 사냥터로 간다!'(웃음)"
―사냥에 성공하셨군요.
"레이더에 20노트(시속 37㎞)로 빠르게 이동하는 물체가 잡혔어요. 접근해서 보니까 일본 어선이야.
일본어로 '시모노세키호'라고 쓰여 있고, 낚싯대하고 그물도 보이더라고.
그런데 어선치고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요.
이상하다 싶어서 망원경으로 자세히 봤는데 모두 운동화를 신고 있더라고. 어부는 장화 신잖아.
이거 간첩선이로구나 확신했지요."
그는 위협사격 끝에 간첩선을 나포했다.
군은 이때 붙잡힌 간첩을 심문해 고정간첩 8명도 추가로 검거했다.
최영섭은 이 같은 공으로 금성충무무공훈장 등 무공훈장 4개를 받았지만, 별을 달지 못하고
1968년 전역했다.
그의 전우들은 "최영섭이 해군참모총장이 됐어야 했다"고 말했다.
―일찍 전역하신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전우, 해군 후배들이 많더군요.
"구축함 함장이 참모총장보다 더 낫습니다. 마음대로 신나게 싸울 수 있으니까!"
―해군에선 바른말 너무 많이 해서 별을 못 달았을 거라고 하던데요.
"못 단 게 아니라 안 달았어. 그 이상 말할 필요 없다! 묻지도 마!"
―전역 후에도 해군 부하들이 집으로 자주 찾아왔다면서요.
"부하들이 하도 침울해 하길래 그랬어요. 군에서 나와 회사 취직하니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왜냐?
집안 식구들에게 철 따라 과일 사다 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군인 월급이 빠듯해요. 대령 때도 집에 과일 한 번 사서 간 적이 없었어.
전역할 때까지 아내가 뜨개질 부업을 했어요.
중령 때 근무지가 진해에서 서울로 바뀐 적이 있어요.
서울 종로 와룡동 셋방살이 시작했는데, 그 방이 원래 머슴 살던 방이었어.
둘째 아들 태어난 지 28일째 되던 날 이사했지요."
육·해·공군, 해병대 지휘하는 통합 사령관
그의 둘째 아들은 3일 임명된 최재형(61) 감사원장이다.
"감사원장 후보 중 28번째였다나.
흠결 없고 보수에서도 인정할 만한 사람 찾다 보니 내 아들까지 순번이 왔나 봐.
자랑할 게 못 되지(웃음)."
그는 "자랑할 게 있긴 있다"며 "내가 이래 봬도 육·해·공군, 해병대 대원을 지휘하는 통합 사령관"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요?
"내 밑에 동생 2명이 있는데 한 명은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하고, 한 명은 해군 부사관 출신입니다.
아들 넷 중 첫째는 해군 대위로, 둘째는 육군 중위로, 셋째는 공군 대위로, 넷째는 육군 소위로 군 생활 했어요. 손자 1명은 해병대 중위로 DMZ(비무장지대) 소대장 했고, 2명은 육군에서 복무했지요.
1명이 현재 해군 갑판병입니다.
직업 군인은 아니었지만 모두 장교 아니면 최전방에서 군 복무하라고 시켰지요."
―왜 그러셨어요?
"전방에서 적하고 대적해봐야 국가 안보가 정말 중요하구나 체감할 것 아니요?
나라 지키라고 군대 갔으면 확실하게 지키다 와야 할 것 아니요?"
최영섭은 2016년 6월 28일 롯데 자이언츠 부산 홈구장에서 시구했다.
해군 복무 중인 손자가 시타를 했다.
손자는 최재형 감사원장이 입양한 아들 두 명 중 한 명이다.
―보수적으로 보이시는데, 입양한다고 했을 때 찬성했나요?
"둘째 아들한테 그랬어요. '지금 네 나이가 50 가까이 되었는데 입양해서 먹여 살릴 자신 있냐?'(웃음)
둘째가 원래 딸 둘이 있었는데, 며느리가 버려진 아이들 키우는 유아원에서 봉사하다
연이 닿아서 키우게 됐지요.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 아이들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 낳은 아기다. 그러면 마땅히 대한민국에서 키울 책무가 있다'고요.
제 아내 정옥경 여사가 세상 뜬 지 8년8개월하고 나흘째요.
유품 지갑에 입양한 손자 두 명 사진이 있더라고.
우리 손자들 모두 똑같이 예쁩니다."
"대한민국을 지켜주십시오"
최영섭은 전사자 유족 찾기 운동을 펼쳤다.
6·25 당시 장사동 상륙작전에 투입됐다가 숨진 11명의 문산호 민간인 선장과 선원 명단 찾는 데도 일조했다.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숨기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는데,
최근까지도 작전에 참가했던 민간인은 잊힌 존재였다.
"내가 찾은 거 아니요. 여기저기에 '조상 찾는 것처럼 해라' 닦달을 하긴 했지만.
찾아 나선 지 4년 만인 2016년 해군이 해군문서고에서 발견했지요.
문산호 영웅들을 나라도 잊고 군도 잊고 국민도 잊어버린 게 너무 슬펐어요.
미군과 이스라엘군이 왜 강한가.
내가 전사하더라도 끝까지 시신을 수습하고, 내 가족을 국가와 국민이 지켜준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6·25에서 전사한 부하 동상을 각 모교에 세우기도 했다.
출신 학교에 동상 세우면 그 학교 후배뿐만 아니라 지역 사람들이 다 봅니다.
'우리 선배가, 우리 동네 출신이 6·25 때 바다를 지켰구나. 그래서 오늘 대한민국이 있구나'
이 마음을 심어주는 겁니다."
그는 '대한해협해군전승유공회 백두산함'이라고 쓰인 수첩을 보여줬다.
대한해협해전에 참전한 백두산함 승조원 76명의 얼굴 사진과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수첩에서 얼굴을 가리키며) 기관총 사수 조경규입니다. 2015년 8월 24일 숨졌어요.
이 친구도 죽고, 얘도 죽고, 내 차례도 오겠지…." 그에 따르면 현재 76명 중 11명이 생존해 있다.
그는 "내 유언은 대한민국 지켜달라 이거요!" 했다.
"지금이 6·25 이래 대한민국 최대 안보 위기입니다.
김정은은 조만간 핵으로 대한민국을 겁박하고 굴종하라고 할 겁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눈을 편히 감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한 번 무너진 조국은 다시 오지 않
는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가 2013년 쓴 책 '6·25 바다의 전우들'은 이렇게 맺는다.
'조국을 지키고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전우들의 울부짖는 호소가 귓전을 울린다./
오! 나를 일으켜다오./ 파도처럼, 구름처럼 내 다시 우뚝 일어서/ 내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겠노라!'
최영섭은 5시간 인터뷰를 마치고 현관에 나와 거수경례로 인사했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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