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8.16 16:03
1950년, 기습 남침을 감행한 인민군이 해일처럼 쳐내려와서
나라의 명맥이 낙동강 하구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때,
성공 확률 5000분의 1이라는 최악 조건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단숨에 전세를 뒤집고 서울을 수복한 것이
오로지 맥아더 장군의 직관과 치밀함과 결단과 지략 덕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야 그 아슬아슬한 작전의 성공이
그런데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야 그 아슬아슬한 작전의 성공이
맥아더 장군의 병법(兵法)에만 힘입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성공 뒤에는 인천항 일대의 인민군 기뢰 매설 지도를 비롯한 유엔군의 인천 상륙 가능성에 대비한
인민군의 방어 시설, 병력과 장비, 보급선 등의 정보를 목숨 걸고 캐낸 해군 첩보대의 활약이 있었고,
경북 영덕군 장사에 상륙해서 인민군과 교전을 벌여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진행될 수 있게 한
학도병 부대 772명의 영웅적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참 부끄러운 무지(無知)다.
그런데 이토록 중대한 사실을 기록한 전사(戰史)가 드물어 참으로 안타깝다.
윌리엄 맨체스터가 저술한 맥아더 장군 전기 '미국의 시저'에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의 전략적 필수성과 성공 가능성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과 미 국방부를 설득하는 데 무진 애를 먹었던 이야기만 있다.
백선엽 장군은 그해 8~9월
낙동강 전선에서 국토의 마지막 한 조각을 지키기 위해 사선(死線)을 무수히 넘나드느라 그랬는지
그의 회고록에는 인천상륙작전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지 않다.
6·25 전쟁 연구의 권위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한국 1950년, 전쟁과 평화'에는
6·25 전쟁 연구의 권위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한국 1950년, 전쟁과 평화'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인민군이 사실상 인천을 유엔군 상륙작전 후보지 셋 중의 1위로 예측하고
작전 저지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분투했고,
그 때문에 인천에서 서울까지 불과 40㎞ 거리를 유엔군이 돌파하는 데 13일이나 걸렸음을,
최신 밝혀진 여러 자료를 인용하며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임병래 중위 휘하 해군첩보부대의 'X―ray 작전'이나
장사에 상륙해서 인민군과 교전함으로써 유엔군에게 인천에 상륙할 틈을 준 소년 학도병들의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 준 호국 영령들에게 그들의 은덕으로 나라와 삶을 받은 후손들이 할 수 있는 보답은 그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 준 호국 영령들에게 그들의 은덕으로 나라와 삶을 받은 후손들이 할 수 있는 보답은 그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