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한국전쟁]

지게부대원 유해 발굴 (이진석 위원, 조선일보)

colorprom 2017. 11. 26. 18:13


[만물상] 지게부대원 유해 발굴


    입력 : 2017.11.25 03:06


    "걸으면서 졸고 쓰러지고…. 그러면서 밤새도록 탄약을 나르는 거예요."
    "가다가 손을 꼬집어봐요. 그래도 감각이 없어요."

    6·25전쟁 당시 지게를 지고 탄약과 보급품을 최전방 고지로 나르던 부대가 있었다.
    그 부대 생존자들이 한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민간인 노무자들이었다.
    정식 명칭은 '한국 노무단(KSC· Korea Service Corps)'이지만
    지게를 지고 일한다고 해서 '지게부대'라고 했다.
    미군들은 이들이 짊어진 지게가 알파벳 A자를 닮았다고 'A 프레임 부대(A Frame Army)'라고 불렀다.

    ▶이들은 탄약 등 전투 물자와 보급품을 운반하고 진지 공사, 부상자 후송, 도로 보수 같은 데도 동원됐다.
    초기에는 피복이 지급되지 않아 무명 바지나 학생복 등 징집 당시 복장이었다.
     45kg 정도의 보급품을 지게에 싣고 하루 16km 정도를 걸어 다녔다고 한다.
    총기가 지급되지 않았지만 미군에게 얻어서 일부는 무장도 했고, 전투에 참가해 전사한 경우도 많았다. 

    [만물상] 지게부대원 유해 발굴
    ▶징집 등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35~45세였지만 10대 소년부터 노인까지 뒤섞였다.
    복무 기간도 6개월로 돼 있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휴전 때까지 세 사단과 두 여단으로 편성됐는데,
    어떤 기록에는 6만명이었다고 하고, 9만~13만명쯤이라는 추정도 있다.
    20만명을 웃돌았다는 말도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 2064명이 전사했고, 4282명이 부상했다.
    2448명은 실종 처리됐다.

    ▶실종된 지게부대원 가운데 유해가 발굴돼 신원이 확인된 첫 사례가 나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엊그제

    "6·25전쟁 참전 노무자 고(故) 김아귀씨 유해와 유품을 유족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51년 나이 마흔에 지게부대에 들어갔다.

    아내와 3남 3녀에게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진 못했다.

    다섯 달 만에 강원도 양구군 일대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들 학모(78)씨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하다 7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작은 체구지만, 무거운 보급품을 지고 고지를 오가며 지원 업무를 용감하게 수행했다."

    6·25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은 지게부대원들에게 감탄했다.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더 파병해야 했다"고도 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참으로 많은 분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24/20171124027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