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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아 기르는 일을 기록한 예술 (우정아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7. 12. 12. 14:44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201] 아이 낳아 기르는 일을 기록한 예술

  •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입력 : 2017.12.12 03:10

메리 켈리, ‘산후 기록’ 중에서, 1973~1979년, 종이, 레진, 석판, 크기 20×25.5㎝, 온타리오 아트 갤러리 소장.
메리 켈리, 산후 기록중에서, 1973~1979,
종이, 레진, 석판, 크기 20×25.5, 온타리오 아트 갤러리 소장.


1976년 10월, 영국 미술가 메리 켈리(Mary Kelly·76)가
작품 '산후 기록(産後記錄)'의 첫 부분을 런던의 한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전시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액자에 고이 끼워둔 더러운 아기 기저귀들이 한 줄로 벽에 걸려 있었다.
평론가들은 똥 기저귀도 미술이냐며 일제히 그녀의 작품을 질타했다.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켈리는 1973년에 첫아들을 낳은 후, '산후 기록'을 제작하면서
육아와 미술가로서의 작업을 결합했다.
이는 135점의 기록물, 도표, 오브제 등으로 이루어진 설치 미술로서,
그 내용은 처음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워킹맘'으로서의 켈리
출산 이후로부터 아들이 만 다섯 살이 되는 해까지의 일상을 기록하고 사소한 물건을 모아둔,
육아일기에 가깝다.

그 시작이 바로 문제의 기저귀들이었고,
이 방대한 작업은 아들이 어느덧 성장하여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되면서 끝난다.
요컨대 아이가 엄마에게 온전히 의존하는 생물학적 존재로부터
발달하여 언어를 배우는 사회화 과정으로 들어설 때까지를 기록한 것이다.

'산후 기록'을 통해 켈리는, 매일 수유량과 배변 상태를 기록하고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고 일과 육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 긴 시간 동안
아이가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도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걸 보여준다.
처음부터 엄마였던 여자는 없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에는 아이가 서툴게 쓴 이름이 등장한다. '켈리 배리'다.
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아들 또한 미술가로 성장했다.
자식에게 아버지의 이름만이 전해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룬 엄마의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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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11/20171211030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