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0.24 03:10
15세기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 선량공(善良公) 필리프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에서
때에 따라 영국의 편에 섰다가 정세가 변하면 프랑스와 동맹을 회복하는 등
강대국 사이의 분쟁을 이용하며 영토를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잔 다르크를 잡아다가 영국에 넘겨준 이도 필리프였다.
필리프의 궁정은 당시 유럽의 어떤 왕실보다도 호화롭기로 유명했다.
그는 기사단을 이끌고 도시들을 옮겨 다니며 마상 시합과 함께 화려한 연회와 축제를 연달아 개최했는데,
그 연회의 호사스러움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그 궁정에는 '부르고뉴 악파'를 형성한 뛰어난 작곡가들이 있었고,
로히어르 판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1400~1464) 같은 당대 최고 화가가 실내장식을 담당했고, 고가의 태피스트리가 다량 제작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로히어르는 필리프의 초상화도 그렸지만 원작이 남아 있는 것은 책의 삽화뿐이다.
로히어르는 필리프의 초상화도 그렸지만 원작이 남아 있는 것은 책의 삽화뿐이다.
그러나 손바닥만 한 작은 삽화에서도 고화질 사진처럼 세밀하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유화 장인 로히어르의 실력은 여실히 드러난다.
점령지 에노(Hainault)의 역사책을 헌정받는 필리프의 모습은 과연 최고 패션 리더답다.
그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킬힐을 신고,
파워 숄더가 돋보이는 검은 벨벳 재킷 위에 기사단의 상
징인 금빛 목걸이를 걸었다.
패션의 완성은 창백하고 날카로운 그의 얼굴을 검은 벨벳으로 풍성하게 감싸준 모자 샤프롱이다.
유능한 군주의 모습이 이렇게 '에지(edge)'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유럽 각국의 귀족들은 그를 모방하고자 온갖 사치품을 앞다투어 부르고뉴에서 수입했다.
호화롭고도 세련된 지도자의 취향이 때에 따라 국가 경제에 한몫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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