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1 : 존 웨슬리(그림·1703~91)는 감리교의 창시자다. 영국 성공회 사제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22세 때, 그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나의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나 자신을 나에게 바친다는 것은 결국 악마에게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젊은 나이에도 ‘예수’를 향한 그의 방향성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밋밋했다. ‘강한 의지’만으로 설교에 ‘숨결’이 흐르는 건 아니었다.
훗날 그는 “당시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청중이자, 신자였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회개의 도리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존 웨슬리 회심 270주년
창시자 정신을 되짚을 때
#풍경2 : 32세 때,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다.
그러나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배를 탔다. 선교를 위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거센 폭풍이 몰아쳤다. 웨슬리는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배 안에 있던 독일 경건파인 모라비아 교도들은 태연했다.
그들의 표정에선 아무런 두려움도 읽히지 않았다.
폭풍이 물러간 후 웨슬리가 물었다.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들은 답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죠.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죠.”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랬다. 죽음 앞에서 ‘나’를 부여잡을 때 어김없이 ‘공포’가 올라온다.
웨슬리는 사제가 되면서 “나 자신을 나에게 바치는 건 결국 악마에게 바치는 것과 같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몰아치는 폭풍 앞에서 그는 ‘나’를 부여잡았다. 여전히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곧장 모라비아 교단의 목사를 찾아갔다. 그건 ‘목마름’이었다.
목사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나요?”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나요?”
이 물음은 화살처럼 웨슬리의 가슴에 박혔다. 웨슬리는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신랄한 ‘영적 물음’을 맞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풍경3 :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웨슬리는 절망했다.
“나는 원주민들을 회개시키러 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모든 이에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라고 외칠 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이후 웨슬리는 끝없이 자신을 낮추었다.
그리고 결국 1738년 작은 집회에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이후 웨슬리는 달라졌다.
성공회에선 격식을 파괴하는 그에게 설교를 금했다. 그러자 그는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거리에는 늘 수천 명의 청중이 모였다.
88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웨슬리는 4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고, 40만㎞가 넘는 선교 여행을 다녔다.
18세기 영국 사회에선
“감리교인과 단 5분만 대화를 해보라. 그럼 당신도 감리교인이 되고 말 것”이란 말이‘상식’처럼 퍼졌다.
그만큼 감리교인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개혁파’였다.
#그리고 풍경4 : ‘2008년 11월 한국의 감리교’는 도무지 낯설기만 하다.
하나의 교단에 두 명의 감독회장이 뽑혔다. 한 나라에서 두 명의 대통령을 뽑아놓은 셈이다.
한 쪽에선 “사법부에서 후보 등록을 무효화했으니 후보 자격을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또 다른 쪽에선 “우리가 최다 득표를 했으니 명실공히 당선자다”라고 받아친다.
“상상을 초월한 액수의 돈을 썼다”는 소문이 돌고, “1000원 짜리 한 장도 준 적이 없다”는 반박도 들린다.
그래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2008년 한국 감리교에는 ‘존 웨슬리’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예수를 아는가?”라는 물음에 가슴을 찢었던 웨슬리,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라며 절규했던 웨슬리,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고 외치고 싶다”며 기도했던 웨슬리,
그 웨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올해는 존 웨슬리 회심 270주년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쿠오바디스, 감리교(감리교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