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독립군에 바쳤던 '가려진 장군' 최운산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패(大敗)시킨 전투로 유명한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 전투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홍범도와 김좌진 외에 우리가 몰랐던 영웅이 있었다.
입력 : 2017.03.10 08:06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대한 역사 서술에서 '최운산'이라는 이름을 찾기는 쉽지 않다.
최운산은 봉오동 전투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던 최진동의 동생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최운산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인적·물적 토대를 쌓았고, 독립군에게 무기와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군 활동에 일생을 바쳤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 뒤에는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삼 형제가 있었고,
그중에도 최운산의 역할이 컸다.
- [박종인의 땅의 歷史]
- 만주벌 봉오동 승리 뒤에는 최운산이 있었다
최운산,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부산 여섯 배 면적의 땅 소유했던 거부(巨富)
최운산은 1885년 11월 7일 중국 옌지(연길·延吉)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이다.
삼 형제의 둘째인 그는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강력한 무력투쟁만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 믿고
1908년 청의 군대에 들어갔다.
최진동은 청나라 지방 군대의 고급간부가 됐고, 최운산은 지방 군대의 보위단 간부를 지냈다.
동생도 보위단 간부로 근무했다.
최운산은 중국어에 능통했고 고위 관료 친구도 많았다.
중국이 토지 정리를 할 무렵 그는 몇 개 군(郡)에 이르는 벌판을 헐값에 불하받았다.
개간 작업을 거친 황무지는 값이 폭등했고 최운산은 갑부 지주가 되었다.
축산, 미곡, 무역에 주류, 제면, 성냥, 비누 공장까지 운영하는 간도 제1의 거부가 되었다.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는
"함께 투쟁했던 어르신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 땅이 부산 면적의 여섯 배였다"고 했다.
"만주 거치는 모든 독립운동가를 환대하고 지원했다"
무술과 총술에 능한 최운산은 간도 지역 중국 군관으로 근무했다.
마적*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군사학교를 열고 사병(私兵)도 조직했다.
1915년에 그 사병 숫자가 500명에 달했다. 자위부대 이름은 도독부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효되고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무대를 만주로 옮겼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부모와 형제를 포함해 최 씨 일가가 모두 당시 황무지였던 봉오동으로 이주해,
모은 재산으로 신한촌(新韓村)이라는 마을을 건설했다. 봉오동을 독립운동가들의 기지로 택한 것이다.
옌볜대 민족력사연구소 김춘선 교수는
"(최 씨 형제는) 만주를 경유하는 모든 독립운동가를 환대하고 지원했다."고 말했다.
* 마적:
청나라 말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걸쳐서 화베이(華北) ·둥베이(東北) 지역에 할거한 기마집단.
전 재산 투입해 봉오동 산중에 투쟁기지 건설
봉오동에 독립군 기지가 완성된 해가 1915년이다. 3·1운동이 터지고 도독부는 군무도독부로 확대됐다.
최운산은 형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최운산 자신은 참모장을 맡아 재정과 행정을 책임지며 군사정보 수집 및 전투에도 참여했다.
최운산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운산 이외에 명길, 문무, 만익, 풍, 빈, 고려 등
모두 7개의 이름을 사용해 가며 무기구입과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
봉오동 전투 시 일본군의 토벌계획을 사전에 입수해 매복 작전을 짠 것도
최운산의 첩보에 근거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는 이렇게 기록했다.
"한 푼의 찬조금 없이 최운산의 사재로 장비, 피복, 식량을 조달했다.
대포 6문, 장총 500정, 권총 수십 정, 실탄 수만 발, 수류탄 수백 개…"
홍범도, 김좌진 등 만주 무장투쟁세력 모아 연합 독립군 조직
무기는 중국-러시아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서 구입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독립군,
그러니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최 씨 형제의 군무도독부를 통합한 조직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였다.
형 최진동이 그 총사령관 격인 '부장(府長)'이었고
(그런데 봉오동에 있는 기념탑에는 홍범도가 사령으로, 최진동이 부사령으로 기록돼 있다.)
군수물자 구입과 기지 건설, 식량 구매 비용은 모두 최운산이 댔다.
'부산 여섯 배에 달하는' 토지를 팔았고 공장을 매각했다.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갑자기 봉오동에 연합사령부가 생긴 게 아니다.
최진동, 최운산 같은 물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고 말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1920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있는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했다. 일본군 1개 소대가 이들을 추격하자 독립군은 즉각 퇴각했다.
두만강을 넘어 추적해오는 일본군에게 또 다른 독립군 부대가 일격을 가하고 즉각 퇴각했다.
함북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이 1개 대대를 보내 독립군 사령부가 있는 봉오동까지 진격했다.
3면이 산으로 싸인 고산 분지 봉오동에서 일본군은 매복해 있던 독립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교전 결과는 공식 기록상 아군 전사자 3명,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 10명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맞붙은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였다.
4개월 뒤 연합 세력이 주 활동지로 복귀하면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붙은 전투가 청산리 전투였다.
이 또한 만주 무장투쟁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로 기록된다.
봉오동을 본영으로 하는 독립군 이름은 북로독군부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간도국민회군과 최진동-최운산의 군무도독부군이 연합한 부대였다.
1군사령관은 홍범도, 독군부 부장 즉 연합사령관은 최운산의 형 최진동이었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은 간도 지역 독립군 박멸 작전에 돌입했다.(간도참변)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는 이후 총무처에 남편의 공적을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건국훈장을 받던 1963년, 형 최진동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최운산, 전 생(生)을 바친 애국(愛國)
최운산, 후대의 이야기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최운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2016년 7월 설립됐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망국의 처절한 시기에 숭고한 민족애를 바탕으로 한 최운산 장군의 자기희생과 활동이
극히 일부만 알려져 있다"며
"우선 최 장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더 찾아 연구하고 재조명하는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참고=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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