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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 "

colorprom 2016. 5. 26. 15:23

* 주 사랑님에 대한 답글

 

주 사랑님, 님의 권면(지적)을 감사함으로 달갑게 받습니다.
제가 주님을 영접한 후 크게 바뀐 것이 있습니다.
그 바뀐 것 중 첫째 되는 것은 저에게 닥쳐오는 환경 중 기쁜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픈 일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주님 나라에서 더 온전한 자로 성숙시키기 위하여 그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고 또 여겨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참새가 팔리거나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마 10:29)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류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에게는 어느 누구도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고 지적의 대상이나 원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영접했다 함을 다음 말씀을 통해 확증했고 제가 그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삶의 실제 속에서 자주 체험을 하곤 한답니다.
신앙은 이론이거나 지식으로 느끼고 여기는 것이 아니며 말씀의 능력이 삶 속에서 흘러 넘침으로 그 분의 함께 하심을 항상

체험함으로서 늘 삶으로 받아들이며 그 분의 인도함을 따르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요일 2:9-11)

 

위의 말씀 구절에서 빛(예수 그리스도) 가운데 있다고 여기고 있으면서 실제 삶 속에서 자신에게 부딪쳐 오는 한 영혼 한 영혼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긍휼히 여기기보다 자신의 잠재되어 있는 사고와 다른 상황(!!!)들이 부딪쳐 왔을 때 자신의 잣대에 맞춰 보고 좀 어긋나면 배척하여 멀리 하는 것은 빛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삶을 사는 것은 어두운 가운데(사단 속에 갇힘) 있는 사람이다 하는 말씀에 속하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항상 깨어서 근신하는 자는 바로 사단에 속하여 주님을 주여 라고 부르는 자 곧 이웃을 자신의 잣대로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심장을 공급받아 (빌 1:8) 그 분의 명령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라고 (요일 2:9-11)의 말씀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풍성하신 주님은 부족한 저에게 이 비밀을 계시하여 주셨고 또 어린 아이처럼 그 말씀대로 믿고 그 분의 음성에 따라

순종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게 하셨습니다. (마 11:25-27)
그 결과의 산물로서 제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직면되는 환란 때문인데 이 환란은 가까운 이웃에게서 온다는 것을 체험을 하셨던 분들은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마 24:9)
그런데 이 환란은 알고 보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주님 안에서 쉼을 얻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함으로 큰 고통 속에서 누구나 힘들어하게 되지요.

이럴 때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멍에를 지고 힘을 얻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 11:28-29)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멍에를 지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자의(恣意)적인 관념에 젖어 자신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나, 여전히 자신의 내면은 원수에 대한 미움과 또 고통스러운 환경에 대하여는 전혀

자유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체험하는 삶은 이것하고는 사뭇 다르지요.

그 이유는 제가 주님의 멍에를 멨다고 여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직접 메기 때문이죠.
그 멍에를 지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매 순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저희 심령 깊은 곳에 크신 사랑의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어떤 원수도 사랑으로 품어 안을 수 있는 위대하신 그 분의 사랑이 저희 내면에서 능력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겉으로 표출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원수가 원수로 느껴지지 않고 어떤 열악한 환경도 감사로 받아 드려지게 되는 삶을 살아지는 실제가 될 때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쉼)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 즉 힘은 주님의 능력이 임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멍에를 진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들이 들어올 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를 이끌려고 하는 사단을 대적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 도움을 청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멍에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때 우리는 죽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운행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서 왕 되셨으므로 원래 죄를 좇으려고 했던 우리의 겉 사람은 죽어 있으므로 저항 없이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어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미움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없으신 주님을 안에 모셨을 때에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오직 미움을 일으키는 것은 사단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미움을 조장하는 사단에게 이끌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 주님의 자녀들은 깨닫고 더 이상 사단에게 속지 말아야 되리라 믿습니다.

이렇듯 미움을 주는 마귀에게 속하면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패배한 자가 됩니다.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께 의존하기 위해 멍에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 안에서 항상 쉼(자유)을 얻기 위하여 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성품(벧후 1:4)을 공급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 5:44-45 눅 6:35에서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원수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조용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분의 능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성경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요일 4:20,21)

우리가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 와서 완전케 된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망각한 채 주님 앞에 서 있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여 그 뜻의 큰 의미를 전해 드리렵니다.
구약에도 신약에서 말씀하신 크고 첫 째 되는 주님을 사랑하는 법과 크고 둘 째 되는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신명기 6:5,

10:12,13 등과 레위기 19:17,18에 기록하여 말씀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약에는 없었던 말씀이 신약에서 완전케 하신 말씀에서 보면 더 보완되어 그 뜻이 더욱 강화되어

졌음을 알게 됩니다.

 

구약의 계명은 마음, 성품,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신약의 완전케 된 계명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 22:37-40, 막 12:30, 눅 10:27)

이렇듯 신약의 계명에서는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추가되어서 구약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훨씬 더 강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목숨을 다한다”의 뜻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집고 넘어가야 되리라 봅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목숨은 딱 하나 밖에 없으므로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은 남녀노소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목숨은 영과 육을 다 포함한 전인적인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렇듯 가장 소중한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순교적 사명을 받은 자들이므로 실제로 목 베임 받는 순교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산 순교를 하여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려야 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마 7:21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므로 많은 분들이 “말씀대로 순종합시다.”라고 외치지만 막상 누군가 성경적으로 살고 있는지의 토론을 할 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순종한다는 개념을

막연히 추상적으로 이해하여 피상적인 순종을 하는 것을 자신에게 합리화시켜 정당화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 실정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무사통과 되어 생명의

부활은 이미 획득했다는 전제 하에서 이제 구원에 관해서는 기초적인 것은 확립했으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신 큰 은혜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 등을 받아서 사람들 앞에 더 많이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과 높임을 받아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자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경을 자세히 보시는 분들은 금방 아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맥락의 성경 구절들을 다 기록하여 설명하자면 글이 꽤 길어지겠기에 일일이 나열하는 수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듯 성경을 추상적으로 이해하여 사는 것은 성경이 원하는 바와 정 반대로 위배된다는 진리를 깨달아 알아 지는 것이 성경을 통해 주님을 점점 깊이 알아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천국을 소유하여 주님 안에서 완전해져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라고 하겠지요.

 

성경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아직 자기 의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며 성경화가 되지 못한 것이고

자기화 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를테면 신본(神本)적인 삶이 아니라 인본(人本)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제가 멍에를 지는 이유는 바로 자기화 즉 인본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나서 주님의 다스림을 완전히 받아서 주님 안에서 자유하고 또 주님의 뜻을 이뤄 드리므로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계명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을 읽게 되면 곧 그 해답을 얻게 됩니다.

 

성경 66권의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순종으로 화답해야 됨을 성경 전체 속에 함축하여 우리에게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불신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므로 제외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해당되어 우리가 순종하면 영생이 있고 불순종하면 영벌이 있다라고 분명히 단서를 달아 명백히 그 뜻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은 추상적으로 믿고 피상(皮相)적으로 순종했다고 여기면서 " 나는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되지 않겠지 " 라고 생각한다 해서 말씀을 지켜 행한자(者)의 반열에 서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곳곳에 기록하여 믿는 자들을 일깨우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로 살아야 됨을 아는 제가 이웃을 저주하는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되시나요?
불꽃같은 눈동자로 분초마다 시험(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심 (욥 7:18, 약 5:9) 을 아는 제가 이웃을 저주하는 글을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시나요?
 
그 죄의 보응이 어떠하다는 것을 저는 성경을 통해 보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계에 여러 차례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사람들의 세계를 보고 왔는데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어리석은 자로 주님 앞에 서 있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주님께서 가끔 글 제목을 주시면서
“이 글을 나와 함께 기록하도록 하자. 마 24:45의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로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저는 다만 그 분에게 순종하기 위하여 아멘 하고 따른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과 글을 쓰는 동안 또 쓰고 난 후에 사단이 강하게 역사 하므로 저의 주변 환경은 상당히 복잡해지고 저의

영육은 완전히 지쳐있게 됩니다.
그것에 더해서 글을 읽으신 분들 중에 권면(지적)의 글들이 강하게 쇄도해 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이 원하시면 결코 불순종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저의 내면에 부어지는 그 분의 사랑이 너무나 크시기에 저는 그 분을 마리아처럼 (눅10:41,42) 그 분의 발 밑에 바짝 붙어 사랑에 빠져 거의 그 분만을 바라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임재 하심 속에서 그 분과 깊은 교제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기뻐하므로 그런 시간들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저에게는 큰 아픔이 됩니다.
그러므로 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그런데 제가 왜 그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이웃을 저주하는 글을 쓴단 말인가요.

그리고 시간을 절약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답글을 일일이 올려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랍니다.

 

주 사랑님, 저는 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웃을 저주하는 글을 의도적으로 쓸 그럴 여력이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떳떳이 이런 사실을 고백할 수 있고 님에게 또한 그렇지 않음을 확실히 전해 드립니다.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님의 가슴에 상처를 받은 것은 분명하므로 어쨌든 정중히 사과 드립니다.

크신 긍휼로 용서해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질타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적 바랍니다.

 

저의 영(靈)의 눈이 점점 밝아지며 깨닫게 되는 것은 제가 싸울 대상은 결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들어가 서로

미워 하게 하는 어둠의 영(靈)들과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저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심으로 모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은 저에게 그런 삶을 원하십니다.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곧 이웃을 섬기는 것임을 성경과 그 분의 음성을 들음으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 앞에 최종적으로 서는 날까지 이런 삶을 살아드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겠다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다짐 해 봅니다.

 

주님 안에서 님과 천국 까페에 참여하시는 주님의 사랑 받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영원 무궁토록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출처 : 천국은 확실히 있다
글쓴이 : 주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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