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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기독대학교를 사랑하는 이유 - 손원영 목사 [+ 이신 목사]

colorprom 2015. 10. 7. 14:19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서울복음교회, 자유게시판, 박덕진 전도사님이 올려주신 글

 

손원영 목사님.

지난 7월 12일 우리 교회에 오셔서 <아름다운 신앙을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해주신 분입니다.

이 분의 글을 아래에 소개하는데요.

'교회의 성장'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읽어들 보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서울기독대학교를 사랑하는 이유


1. 나는 서울기독대학교를 사랑한다.

학교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학교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연함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요구되는 요즈음 곰곰히

왜 내가 우리 대학을 사랑하는지 반성하게 된다.

 

사실, 우리 대학은 소규모 종합대학으로서 여러 면에서 볼 때, 자랑할 것 보다는 불리한 것이 많다.

특히 외형적으로 매우 작은 대학이기 때문에

간혹 잔디밭에 깔린 낭만적인 큰 캠퍼스를 기대하고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적지 않게 실망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래서 새학기가 되면 신입생들 중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예컨대, "학교가 왜 이렇게 작아요?" 라든지,

혹은 "학교가 주택 한 가운데에 있어서 학교찾기가 너무나 어려워요!"라는 말 말이다.

아마도 이런 비판은 외모지상주의나 외형적 성장을 절대화하는 대기업

혹은 대형교회의 성장논리에 중독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문제제기일지 모르겠다.

 

2. 최근 우리 대학이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새삼 나 스스로에게 질문해 봤다.

나는 성장론자들의 주장처럼 나도 우리 대학이 작고 외형적으로 초라하기 때문에

우리 대학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대답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이다.

오히려 "그러기에 나는 우리 대학을 사랑한다. 아주 많이 사랑한다!!"이다.

 

그렇다면, 소규모의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우리 대학을 사랑할까?

아마 학교 구성원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 이유를 갖고 있겠지만, 나 역시 그 몇가지 이유를 갖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 한 두가지만 사랑하는 벗들과 나누고 싶다.

 

3. 내가 서기대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 때문이다.

사실 내가 환원운동이라는 말을 안 것은 17년전 이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처음 알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환원운동'이란 용어조차 내가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잘 몰랐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배운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한국교회의 상황이 장로교와 감리교를 중심으로 이해된 탓이다.

 

그런데 내가 우리 대학에 들어와서 '환원운동'이란 초대교회의 그 순수성을 회복하는 운동으로써

교리 대신 성서를, 교단이나 교파 대신 교회일치에로 돌아가는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처음듣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 정신은 내가 오랫동안 연세대학교에서 배운

소위 "교회일치정신"(ecumenical spirit)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환원운동이야말로 약 200여개의 교단으로 분열된 한국교회를 살리는 운동이라 생각하여,

기꺼이 환원운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바라기는 교단간의 장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작금의 현실에서

서울기독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환원운동이 더욱 확산되어,

한국교회를 살리는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다.

 

4. 내가 서기대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서기대와 그리스도의 교회가 보여준 "신앙의 순수성"이라는 빛나는 유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교회가 한국에 선교된 것은 1937년이요 또 같은 해 서울기독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물론 국내에서 이미 자생적인 그리스도의교회운동을 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서기대와 그리스도의교회는 올해로 꼭 78년이란 공통의 역사를 갖는다. 적지 않은 세월이다.

 

그런데 외형적인 면에서 교회수와 교인수를 보면 많은 실망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교회수는 약300개정도이고 대부분 미자립교회이다.

교인수는 아마도 1만명이 넘지 않을 듯 싶다. 정말로 아주 작은 초미니 교단인 셈이다.

 

그래서 처음 내가 이 대학에 임용되었을 때, 좀 이상하여 어느 목사님에게 질문하였다.

"목사님, 왜 적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리스도의교회의 교세가 작습니까?"

그런데 되돌아온 그 목사님의 대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스도의교회의 신앙의 순수성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 이미 대도시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여 자리를 잘 잡고 복음을 훌륭히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선교되지 않은 바닷가나 혹은 산골 농촌지역을 선교지 삼아

그곳으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라도 땅끝마을인 해남이나 강진, 혹은 강원도의 삼척 등 산골지역에 가면

그리스도의교회가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농촌이나 산골마을에서 아무리 교회성장을 위해 노력한다 해도

수천명이 모이는 교회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교세의 확장이나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이 아니라 복음증거 그 자체에 있습니다."

 

나는 그 목사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것이다.

신앙의 순수성!! 나는 그 신앙의 순수성에 감동되어

그 후 지금까지 서울기독대학교와 그리스도의교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신앙의 순수성이 어떤 상황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목하 서기대가 겪고 있는 위기도 이 신앙의 순수성으로 꼭이겨내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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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한 2015.09.29 15:06

답글

  • 이신 목사(박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 <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을 쓰신, 그분이
  •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계신 이정배 교수님의 장인 어른이라는 말씀을 언뜻 들었습니다.
  • 지난 WCC 부산 회의 동안에 그리스도의교회 목사님 두 분을 뵈었는데,
  • 정말 신앙의 순수함이 느껴졌습니다.
  • 그 중 한 목사님께서 이신 목사님께 직접 배우셨다고 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 교단의 규모로 승부하기 보다는, 서로 인정하며 신앙으로만 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  

     

    조현글방
    조현 기자가 쓰는 기사와 글이 모여 있습니다.

    23.‘신념의 화가 목사’ 이신

    조현 2007. 09. 18
    조회수 6371추천수 0
    04484787_20070911.JPG
    » 이신(1927~81)
    (23) ‘신념의 화가 목사’ 이신

     

    성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을 백안시하는 근본적인 우상 철폐주의자들이 더 돈과 직위와 건물과 도그마를 우상화하는 것을 늘 보게 된다. 오히려 이런 것을 멀리하고 본질을 찾는 신앙인이 이단시된 채.

     

    뛰어난 화가이자 목사였지만 한국 교회의 주류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이신(1927~81)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목사로서 철저히 주류 교단에서도 소외된 채 죽어간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처럼.

     

    박사 출신이지만 낮은 곳 삶
    예술작업으로 본질신앙 담아
    평생 ‘한국적 그리스도교’ 꿈

     

    전남 여수 돌산에서 태어난 이신은

    일제 때 명문인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모태신앙인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에 심취해 있었다. 부산시립도서관의 미술 관련 책을 모두 다 읽었을 정도였다.

    그는 그때부터 형상 이전의 세계를 그려보고 싶어 했다.

     

    상고 졸업 뒤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혔던 은행에 취직했지만,

    그는 결혼까지 한 몸으로 상경해 감신대에 입학했다.

    한국전쟁 직전 신학대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충남 부여에서 활동하다가

    6·25가 터지자 고향인 전라도로 돌아가 활동했다.

     

    그때 전라도 일대엔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 환원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이미 한국 교회의 고질병이던 모든 교파의 분열을 거두고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

    외국 선교사의 입김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교회로서 일치하자는 성령 운동이었다.

     

    주류 교단을 두고, 그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그의 ‘외로운’ 삶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서울과 충청도 일대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이신은 40살이라는 늦깎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려 학비를 조달하고

    서울 명륜동 산동네에 두고 온 아내와 4남매의 생활까지 책임져야 하는 고달픈 유학생이었다.

    그때 중3이던 맏딸이 뇌막염으로 숨을 거뒀지만 와볼 수도 없었다.

    그런 산전수전 끝에 그는 앨 고어도 졸업했던 미국 남부의 명문 밴더빌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71년 귀국했다.

     

    미국 출신 박사가 귀했던 시절이었으니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의 출셋길은 보장됐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주요 교단 소속이 아니었다.

    국내 어느 신학자도 따르기 어려울 만큼 영어와 일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능통한 지성이었지만,

    그는 주요 대학에 진출하지 못한 채 산동네 목회를 계속 해야 했다.

    그는 산동네에서 정신지체아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미국에서 박사까지 따온 사람이 저게 뭐 하는 짓이냐”고 비웃었다.

     

    설상가상으로 75년엔 정부의 무허가 판자촌 철거 정책으로 오두막까지 헐려 그는 괴산의 산골 교회로 떠났다.

    그 곳에서 이신은 손수 돌을 주워 아름다운 교회를 지었고,

    새벽이면 냉수마찰을 한 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화폭에 담았다.

     

    이신은 천재적인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였고 멋쟁이였다.

    그의 손이 닿는 낡은 물건들은 순식간에 귀한 골동품으로 변하고,

    그가 손을 댄 나무는 멋진 목공예가 되곤 했다.


    해방 직후 은행원들 상당수가 적산가옥을 싸게 사서 큰돈을 챙기고,

    한국 전쟁 이후 영어에 능통한 목사들은 선교사들의 지원으로 누구보다 잘나갔고,

    70년대 ‘미국 박사’라면 금값을 주고 모셔 갔지만,

    이신은 매번 부귀영화와 신앙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신념을 택했다.

    그는 스스로 자처한 곤궁함 속에서 안빈낙도하며 살면서도 한국 기독교를 위해 큰 외침을 남겼다.

     

    평생 ‘한국적 그리스도교회’를 꿈꿨던 이신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억압과 침략으로 늘 깨달음 없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한민족이

    신앙마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가 성서를 읽고 깨달은 대로 성서가 우리들의 역사와 삶에 가르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오직 ‘밥’만이 추구됐던 60년대 미국 유학도로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물질화하고 경직화해 창조적 상상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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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이신 목사를 회고하는 이은선 교수.

     

    그의 둘쨋딸로 여신학자협의회 회장인 이은선 세종대 교수(교육철학)는

    “아버지는 속에서 성을 실현하려 했다”며

    “그런 어려운 삶속에서도 자식들에게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고 창조적으로 살다 갈 것을 격려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남편인 이정배 감신대 교수와 함께

    이신 목사의 책들과 그림들을 전시할 이신아카이브를 겸한 수도원을 강원도 횡성에 세워

    아버지의 못다 한 꿈을 이어갈 생각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시작 펴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