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창-58]내분, 심화되는 언약 공동체의 위기 (창 35:16~29) (CBS)

colorprom 2014. 4. 3. 11:34

내분, 심화되는 언약 공동체의 위기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창 35:16~35:29


22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22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라헬의 아들들은 요셉베냐민이며

25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야곱이 기럇아르바마므레로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22절):

르우벤의 행동은 단순히 성적 욕망을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대의 상황에서는, 야곱 가문의 장자라는 위치를 고려한다면

굳이 아버지의 첩이 아니더라도 집안에 딸린 노예들을 통해 성적 욕망을 해소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르우벤의 행동은 사무엘하 16장 21, 22절에 나타난 압살롬의 행동과 유사하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이 아버지를 정복했다는 의식으로 아버지의 첩을 취했다.

그렇다면 르우벤의 행동 역시 압살롬처럼 아버지의 지위를 스스로 취하겠다는 것이다.

르우벤의 욕망은 이후 발생할 야곱 가정의 내적인 갈등(장자권, 유업, 편애)을 반영하고 있다.

 

내분, 심화되는 언약 공동체의 위기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야곱 가정에 연이어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유달리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출산 후 고통스럽게 사망했습니다.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자연스레 라헬의 아들들을 향할 것입니다.

이러한 편애는 ‘장자권’에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야곱의 아들들에게서 심각한 불안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급기야 르우벤은 스스로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르우벤

이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형제들의 모습은 권력을 추종하는 세상의 모습과 지독히도 닮았습니다.

르우벤의 눈에 빌하는 더 이상 살아있는 인격이 아닌, 그의 권력을 담보하는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권력을 향한 소유욕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은’ 물건으로 왜곡합니다.

권력을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은 물건으로 대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도 죽은 물건으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을 향한 모든 욕망은 ‘죽음’을 향한 길입니다.

그 욕망이 야곱의 아들들을 골육상쟁의 내분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권력을 향한 욕망의 끝은 관계의 왜곡과 공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상생을 향한 관계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은’ 물건으로 대하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면 더 이상 그와 다툴 수 없습니다.

신앙의 밝은 눈으로 학벌, 경제력, 출신지역,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봅시다.


+ 권력을 향한 욕망이 아닌 복음을 향한 열정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주십시오.

 

죽음과 장례 (2017년 8월 24일 목요일) (창 35:22~29)


이삭이 살 만큼 살다가 기운이 다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까지 떨어져 살던 에서야곱이 한자리에 모여 아버지 장례를 치릅니다.

그 장례식은, 무려 탯속에서부터 서로 싸우던,(창25:22) 두 형제가 다정하게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몇몇 장례식들 풍경이 기억납니다.


젊은 아내와 딸 둘을 남기고 떠난 젊은 남편의 장례식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장례식이었지만,

두 부부가 성실히 직장생활을 하였기에 문상객도 많았고, 부조금도 제법 들어와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또다른 장례식은 어느 아버지의 장례식입니다.

상주는 대학생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셨습니다.

문상객도 부조금도 적었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애도할 형제도 지인도 적었습니다.


마지막 장례식의 주인공은,

3년간 병간호하던 아내를 먼저 보낸 후 자신도 90세가 넘어 생을 마감하신 목사님입니다.

장례보험 들어놓았다며 문상객들에게 부조금 받지 말고, 슬퍼하지도 말며 즐겁게 지내라고

유언하고 떠나셨답니다. 유족과 문상객들은 그 유언을 기쁘게 따랐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문득 그리스도인의 장례식 풍경은 어떤 단어로 요약되면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봅니다.

'부조금 많으면 좋은 장례식'이라는 물질중심의 한국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이

화해·슬픔·함께 애도함·(역설적 의미의) 즐거움 등의 단어와 함께 상기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하나님,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들어주소서.

그 마지막을 향해 가는 지금 오늘 하루, 그리스도인다운 날들로 만들어주소서. 아멘.


라헬의 죽음이 야곱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르우벤의 의도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