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스크랩] 서초구 의 여러지명 이야기.

colorprom 2010. 10. 16. 12:26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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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서초동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하여 붙여진 동명으로 일명 상초리, 서리풀이라고도 칭하였다.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에서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당산마을:당산마을은 당골마을과 마산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당꿀로도 불린다. 현재 남부터미널이 있는 남쪽 남부순환도로변에 10여호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산제를 지냈던 당이 있었다.

 

사도감마을:이 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 일대를 말하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렸다. 이와 연관되어 양재역 부근에 사도감고개가 있었고 그밖에도 사도감개울, 사도감들, 사도감다리 등도 있었다.

 

왕촌:반포대로와 남부 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서초동 1451번지 일대에는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가 멸망한 뒤 왕씨가 정착하여 500년 동안 거주해 온 곳이다. 조선 건국 후 왕씨가 멸족을 당하게 되자 태조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나 자신의 후손들을 더 이상 멸족시키지 말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성계가 특명을 내려 왕씨들을 더 이상 처형시키지 말고 찾아서 잘 살게 해 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 왕미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서초동 산 127번지에 그의 아들 왕효곤을 비롯하여 100여기의 왕씨 선조의 묘가 있었으나 1971년 도시계획사업에 따라 모두 이장되었다. 개발 전까지만해도 20가구의 왕씨 가문이 살고 있었다.

 


장안말:서초동 삼풍아파트 남쪽 일대를 장안말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세종 10년(1428) 임영대군에 봉해졌고, 세종 21년 여색에 빠졌다 하여 일시 직첩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문종 1년(1451) 왕의 직접 지도로 신무기인 화차를 제작하였으며, 그 후 세조를 보좌하여 조정과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곡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를 말하는데, 옛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입구에 자연석 2개에 '鄭谷(정곡)'이라 정중만의 글씨로 새긴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로변 해주 정씨 대종친회 건물 앞에 옮겨져 있다.

잠원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 불려왔는데 1914년에는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로 칭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잠원동이 되었다. 잠원동은 뽕나무, 양잠과 관계가 깊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엔 이곳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잠원동:잠원동이란 동명도 양잠과 관련있다. 원래 잠실리라 불리던 것이 서울로 편입될 때 송파구의 잠실과 구분하기 위하여 잠실리의 「잠」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인근지역은 뽕나무밭이어서 뽕 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양잠을 치는 농가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강변에 이 지역이 위치하고 있어 뱃사람 또한 많았다.

 

사평장터:오늘의 설악아파트 1동 북쪽, 한신아파트 337동 동쪽 잠원로 부근에는 지금부터 60여년전까지 사평장터가 있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아 돈대마당이라고도 불리던 곳인데 그 동쪽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강나루:한남대교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원래 한강진이 있던 곳으로 예전부터 수상교통의 길목이었다. 일찍이 신라 때는 북동이라하여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때는 사평도라하여 진선이 배치되어 교통편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제1의 도선장으로 송파·노량진과 더불어 경강 3진을 이루었다. 한강나루 북쪽에는 양진단이 있어 나라에서 봄·가을로 사고예방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부근에는 제천정이란 정자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자연을 즐겼다.

한편 한강나루의 진선으로 관선 10척이 있었다. 세종때 삼전도를 신설하면서 1척을 이관하 여 9척으로 운행되다가 15척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한강진은 삼전도와 더불어 대모산 기슭의 헌·인릉과 나루 동쪽의 선정릉으로 가는 길목으로 역대왕들의 도강이 있었고 봉은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한 도성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연산군 때는 청계산 수렵을 위한 부교가 가설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교를 설치하여 도성을 함락하려고 하자 의병들이 이를 파괴하여 작전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현재 한남대교가 경부고속도로에 이어지는 것은 옛날 한강진을 건너 삼남으로 이어지는 옛 길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헐떡서리: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양반이 묻혀 있다는 양반산소가 현재 잠원동 천주교 성당 뒤쪽에 있다.

원단동 이란 마을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풍수 설에 따라 남산의 누에를 먹이기 위한 뽕나무를 마을에 많이 심었고, 세조가 이곳에 원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옛날에 활을 쏘았던 시장 터가 있었고, 예날 황새가 앉았다하여 황샛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잘 나왔다고 한다.


반포동:반포동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곳이 홍수피해를 입는 상습침수 지역으로 반포라고 불렀다 한다.

 

반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지역이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확정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다. 1963년 1 월 1일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이 동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훼손되었기 때문 에 찾아 볼 수가 없다.

1960년대만 해도 신반포로 이서지역의 대부분은 모래사장 또는 늪지 대로 강물 속에 있었다. 약간 높은 지역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갈대밭과 뽕나무밭이 우거 져 있었으며, 채소농업과 양잠업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큰 비가 내려 한강 의 수위가 높아지며 이곳 대부분이 침수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자주 있었다. 일제 때에는 지 금의 반포아파트 일대에 살던 주민들은 유사의 사리채취로 생계를 잇는 이가 많았다.

 


게루지 마을:현재 주공아파트 3단지에는 고모래산이라는 야산으로 게루지마을이 있었고 천주교인의 공동묘지였다.

 

별바위 터와 말무덤 터:옛날 어느 임산부가 산기가 있어 친정인 마포로 가다가 진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 길옆 갈대밭에 들어가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태를 끊을 수가 없어 어려워 할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태는 갈대잎으로 끊으면 되나 아기가 걱정이다"라고 하며 당부하기를 "뒤에 말탄 병사가 쫒아 올텐데 그가 아기는 어떻게 낳았으며, 태를 어떻게 잘랐느냐고 추궁할 것이니 그때 가대로 잘랐다고 말하지 말아라" 만일 말한다면 아이를 죽일 것이다."하고 일러주고는 하늘로 사라졌다.

곧이어 말탄 병사가 뒤쫓아와 산모에게 추궁을 하자 산모는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병사는 즉시 아이를 죽였다. 이 때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아기가 죽은 뒤편 큰 바위에서 무수히 많은 왕벌이 쏟아져 나오더니 그 병사를 향해 날아가 병사와 말을 쏘아 죽였다. 그 후 벌이 나온 큰 바위를 벌바위라고 불렀다. 현재 이 곳에는 반포전화국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방사를 태우고 온 용마가 벌에 쏘여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긴 마을 사람들은 용마를 정성껏 묻어 주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반포동 1번지 경남쇼핑센터 옆이다.

 


서래마을:사평로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에는 예부터 이곳에 살아온 20여호의 원주민들이 있는데, 이 일대를 서래마을 또는 서애마을, 서릿마을이라고 부른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해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또 서애라는 마을 이름은 매곡동(현 조달청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마뉘꿀이라는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이 자기네 서쪽 물가에 있고, 뒤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있으므로 불렀던 이름이다. 서래마을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의이죽으로 요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래마을은 원래 반포 15차 한신아파트가 지어져 있는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피해를 입고 이주해 와 형성되었다.

 


원곡마을:둥근말이라고도 불린 원곡마을은 산 모퉁이에 둥글게 이어져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현재의 강남성모병원 뒤쪽이다. 현재 이 병원의 기숙사 자리는 전에 빙고꿀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이곳은 골짜기가 깊어 겨울에 언 얼음이 늦봄까지도 녹지 않아 이같은 이름이 생겼다한다.

 

방배동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고을'이라는 설과 이 동자체가 '한강을 등진 모서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세조의 큰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세종에게 넘겨주고 전국을 돌아다닐 때 자신의 왕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갔다 하여 방배동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방배리였던 이 동리는 1963년 1월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관악구가 설치되자 관악구 사당1동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1일 사당1동의 분동으로 방배동은 독립하게 되었고 이때 인구는 8,480명이었다. 1978년 10월 10일 방배동은 1·2동으로 분리되고 1980년 4월 1일 사당동의 일부를 편입, 강남구로 이관되는데 이때 이 편입된 부분이 방배본동이 된다. 1985년 9월 1일 방배2동에서 방배3동이 가라져 나오고 1988년 1월 1일로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리·신설됨에 따라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1991년 9월 방배본동과 1동의 서문로와 동광로 남쪽과 사당로 북쪽을 갈라내어 방배4동이 신설됨으로써 방배동의 행정은 방배본동·1·2·3·4 동에서 나누어 맡고 있다.

 


남태령: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여시골(엽시골), 즉 여우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흔하게 널려 있다. 이는 예전에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었다.

한양에서도 인근 경기도로 나가는 관문에는 곳곳에 여우고개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남태령이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로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이다.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했던 정조는 수원에 있는 선친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다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이가 "이 고개 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로 불리는데, 왜 거짓말을 아뢰느냐'고 힐책하자 이방 변씨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나 신하로서 임금께 여우고개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하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에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가까운 골짜기에 호랑골과 여 우골이 있어 여우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명명되었다는 설과, 예날에 천년 묵은 여우가 사 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남태령이 란 이름이 붙게 된 시기에 대해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춘향전에 이 남태령이 이미 나오고 있 으므로 정조 이전에 불려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방배동 고분:방배동에는 고분이 있었는데, 이 고분에서 1970년대에 조선 초기의 목우 6점이 출토되었다. 높이 7~8cm의 목우들은 출토 당시 부분적으로 부식된 곳도 있었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였으며, 원래 채색을 한 듯 약간의 채색 흔적이 남아있다.

6개중 5개는 인물상으로서 3개는 여인상이고, 2개는 남자상이다. 남자 한 사람은 평정건을 쓰고 한 사람은 변발을 하고 있어서 고려 후기 몽고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옷도 남자는 두루마기 같은 포를 입고 있고, 한 여자는 머리에 몽수를 쓰고 두 여자는 고려말에 유행했던 얹은 머리를 하고 있으며, 길이가 긴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나머지 한 개는 마상으로서 균형이 잘 잡히고 사실적인 표현에다 나무결을 잘 살린 작품이다.

이 고분은 방배동의 개발로 인하여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방배동 옛지명의 유래

이 지역은 근래에 신흥주택가로 발전한 곳이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자연부락 명칭들을 통해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천촌말이라 불렀고, 그 뒤에 있는 골짜기를 뒷굴, 그 뒷골에 있는 논을 뒷굴논, 천촌말 고개 너머의 벌을 뒷벌, 천촌말과 사궁말앞 벌을 앞벌, 천촌말 근처의 산개천둑을 갤둑이라 하였고 거꾸로 넘어간다 하여 가꿀고개, 논이 깊어 구레논, 쪽박 엎이 놓은 것 같다하여 쪽박산, 산 아래로 뱅돌아간다 하여 뱅도래미, 새로 생긴 마을은 새말, 옛날에 큰 마을이 있었던 터는 새텃말, 뱀장어가 많아 장앗들, 치달은 골짜기라하여 치골,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바위, 돌 한쪽으로 건너던 다리로 임금의 거동하던 길을 쪽다리,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하여 이복촌(이북굴)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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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창미미 ♬
글쓴이 : 탱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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