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죽은 악당’을 대하는 사회의 품격

colorprom 2023. 5. 20. 14:02

[광화문·뷰] ‘죽은 악당’을 대하는 사회의 품격

 

5년 전 사망한 美 성착취자, 연루자 조사 아직 진행 중
한국의 세상 뜬 성범죄자는 왜 찬미의 대상이어야 하나

 

입력 2023.05.20. 03:00업데이트 2023.05.20. 12:53
 
 
 
 
미성년차 성착취범이자 금융인이었던 제프리 엡스타인이
2017년 뉴욕 사법당국에 출석해 찍은 사진.
그는 이듬해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연루자들에 대한 단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MIT 미디어랩의 스타급 소장 이토 준이치는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고 2019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성년자 성착취범인 금융인 제프리 엡스타인과 몇 차례 어울리고

기부금을 받았다고 드러난 후였다.

그는 엡스타인의 성 착취 사실은 몰랐다면서도

“그 누구보다 피해자들에게 사죄한다”고 썼다.

엡스타인이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한 해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4년이 흐른 지금, 엡스타인에 대한 사회의 단죄는 아직 진행 중이다.

학계·재계·금융계를 망라하는 수많은 인사가 그와 연루돼 그만두거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번 주에만 굵직한 뉴스가 최소 세 건 나왔다.

진보 학자 노엄 촘스키 MIT 교수, 리언 보츠타인 바드대 총장이

엡스타인에게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됐다.

이와 별도로 도이체방크는 피해자들에게 합의금 7500만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미성년 여성들에게 수상한 돈이 이체되는데도 조치를 취하지 않아

범죄를 키웠다는 이유에서였다.

도이체방크는 재발 방지를 위해 직원 교육 등 시스템 개선에 막대한 돈을 투입하기로 했다.

월가(街)의 거물 제이미 다이먼 JP 모건 회장도 비슷한 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미국 사회는 사후에도 집요하게 범죄의 책임을 파헤쳐 추궁한다.

‘죽었으니 됐다’고 여겨선 문제 재발을 막을 수 없다는,

공동체의 암묵적 합의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런 관행엔 ‘범죄자는 갔어도 피해자의 계속되는 삶은 지켜주어야 한다’는 믿음이 깔렸다.

제도의 미비점을 철저하게 규명하고 개선해 범죄를 막자는 취지도 있다.

650억달러 규모의 다단계 금융사기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 버나드 메이도프가
2008년 법정에 출두하기 위해 뉴욕 맨해튼의 저택을 나서고 있다.
그는 법원에서 11개 혐의에 대한 유죄를 인정한 뒤 맨해튼 교정센터 내 5.3㎡ 크기의 감방에 수감됐고
2021년 세상을 떴다. /로이트 뉴시스

 

다단계 금융 사기(폰지)를 저지른 버나드 메이도프는 또 다른 죽은 악당이다.

2008년 수감됐고 2021년 4월 감옥에서 세상을 떴다.

미 법무부는 메이도프의 재산을 추적해 피해자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15년째 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만 역외 도피처에서 3억7200만달러를 회수해 피해자들에게 지급했다.

올해 초엔 그의 사악한 범죄를 해부한 다큐멘터리 ‘월가의 괴물’이 넷플릭스에서 나왔다.

감독 조 벨린저는 “규제 당국과 금융 전문가들이 ‘경고등’을 무시하면

재앙이 얼마나 크게 번지는지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망자(亡者)의 범죄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유명 연예 기획사 ‘쟈니스’ 창업자 쟈니 기타가와(2019년 사망)의

과거 연습생 성 착취 문제가 드러나면서 사장이 주 초에 사과했다.

쟈니스 측은 가해자의 해명을 들을 수 없다는 이유로

‘피해를 호소하고 계신 분들’이란 표현을 써서 논란이 됐지만,

“그분들께 깊이 사죄드린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일본 의회는 미성년 성 착취를 방지할 제도 마련에 착수했다.

 

한국에도 세상을 뜬 성범죄자가 있다.

서울시장이라는 막강한 지위를 악용해 부하 직원을 성적으로 희롱했고

그 사실이 드러나자 202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1년 그의 성희롱 사실과 서울시의 잘못된 대처를 인정하고

재발 방지책을 권고했다. 법원도 이를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가족과 지지자들은 3년째 피해자가 가짜라고 공격해왔고,

이제는 범죄자를 미화한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 7월에 개봉한다고 한다.

 

엡스타인에게 연구비를 받았다가 2019년 사과문을 발표한

세스 로이드 MIT 기계공학과 교수는 이렇게 썼다.

“피해자 여러분께 사죄드리며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엡스타인의 해명이 아니라 경찰 조사, 재판 결과, 언론 보도 등이 밝혀낸 사실을

더 집요하게 확인해야 했습니다.”

 

박원순 사건에 대한 ‘사실’은 수없이 많이 공개돼 있다.

인권위 홈페이지 검색창에 ‘서울시장 성희롱’ 검색만 해도 범죄 사실 확인이 가능하다.

독해력이 떨어져서일까.

세상 뜬 성범죄자를 찬미하겠다는 이들이 아직까지도 소란을 일으킨다.

이 사회의 구멍 난 품격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