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2]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의 비극

colorprom 2022. 11. 27. 18:32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2]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의 비극

 

추방령, 돈과 금, 은 등 귀중품은 못 가져 나가게 해
10여 년 사이에 유대인 26만 명이 빠져나가다

 

입력 2022.11.20 08:39 | 수정 2022.11.27 06:00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1492년 1월 2일 마지막 이슬람을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석 달도 되지 않은 3월 31일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스페인 왕국 인구 700만 명의 6.5%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숫자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특히 유대인들은 장원제도가 발달한 중세에 농촌에 살지 않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도시인구의 1/3을 차지했다.

 

유독 스페인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던 이슬람들이 500년 이상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유대인들은 황금기를 구가하며

‘유대 문화의 최고 전성기’를 이베리아반도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공존하며 문화적으로도 융성한 시대였다.

 

그 무렵 수도 코르도바는 문화와 상업이 발달한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성한 도시였다.

 

1492년 스페인 법원 대심문관이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유대인 추방령에 서명을 요청하고 있는 모습, 에밀리오 살라 작, 1889년. /위키피디아

 

그러다 11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발흥한 교조주의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여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며 학살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이 피난 길에 올라 북부 스페인 왕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14~15세기 스페인 왕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92년 당시 스페인의 재정 고문 아이삭 아브라반넬도 유대인이었다.

스페인을 무역 경제부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유대인 추방령을 돈으로 막으려 하다가 실각한다.

 

유대인 추방은 전쟁 후유증으로 불거진 사회적 불안이 크게 작용했다.

왕실은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기독교 국가의 위엄을 세우려는 의도로

기독교로의 종교 단일화를 제시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 이유도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으로 이완된 민심을 추스르고 바닥난 국고를 채우는 데는

유대인 추방과 재산 몰수가 일거양득의 묘수였다.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신항로 탐사에 들어갈 왕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한몫했다.

 

◇추방령, 돈과 금, 은 등 귀중품은 못 가져 나가게 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4개월 이내에 스페인을 떠나라고 선포한 추방령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재산을 처분해서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용하되

화폐와 금, 은 등 귀중품은 가져 나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발각되면 처형이었다.

한마디로 억지였다. 재산은 놔두고 몸만 빠져나가라는 소리였다.

 

칙령이 발표되자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몇 달 이내에 헐값으로 팔아 치웠다.

집을 주고 당나귀를 얻었고 포도원이 몇 필의 포목과 교환되었다.

 

유대인 추방령. /위키피디아

이렇게 재산을 급하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사는 유대인들은 모든 재산을 평상시에도 나누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1/3은 현찰로, 1/3은 보석이나 골동품 같은 값나가는 재화로, 1/3은 부동산으로

부를 분산시켜 관리했다.

안정적인 재산관리방식인 포트폴리오(Portfolio)는 여기서 유래했다.

 

그 와중에도 대부업을 했던 유대인들은 담보대출 시 저당 잡은 보석류를 챙겼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토지나 부동산 소유는 법으로 금지당했기 때문에

대부분 저당물이 보석류였다.

당시 보석류는 오늘날과 같이 높은 경제적 가치는 없었지만

이는 후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간 안트워프암스테르담

다이아몬드 등 보석시장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다.

 

떠나기에 앞서 12살 이상 되는 아이들은 모두 결혼시켜 가족을 이루게 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어야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이라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레나 나귀에 짐을 싣고 태어난 나라를 떠났다.

단 4개월만인 8월 초에 이르자 추방은 완결되었다.

 

◇10여 년 사이에 유대인 26만 명이 빠져나가다

 

이리하여 유대인 17만 명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1480년 이래 종교재판을 피해 빠져나간 사람까지 합치면 약 26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0여 년 사이에 스페인을 떠났다.

그 무렵 인구 3만이 넘는 도시가 흔치 않은 유럽에서, 26만 명은 대단한 숫자였다.

당시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빠져나갔는지는

학자에 따라 13만~80만 명까지 다양하다.

 

1492년 8월 2일 세비야 근처 항구에서는

마지막으로 추방되는 유대인 무리가 배 위로 탑승하는 동안,

또 다른 세 척의 선박이 그 옆에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바로 그 가련한 유대인들의 후손을 위하여

그가 발견하게 될 신대륙이 피난처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콜럼버스 자신을 비롯해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콜럼버스의 계획은

몇몇 유력한 ‘마라노’(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그의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을 가지고 건조되었고,

그의 선원 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적잖은 마라노들이 끼여 있었다.

 

스페인 북부에 살던 1만 2천 명가량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에 가까운 나바라 왕국으로 향했다.

그곳 통치자들은 오랫동안 종교재판 제도의 도입을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왕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바라 왕국도 결국 종교재판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으로 잠시 피신했던 유대인들은 결국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길을 택했고,

일부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로 향했다.

 

◇결국 포르투갈도 유대인 추방해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한 17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10만 명은

값을 지불하고 인근 포르투갈로 입국했다. 하지만 그것도 5년간의 체류에 불과했다.

 

1495년 마누엘 1세 왕이 포르투갈의 권좌에 올랐는데,

그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의 왕국을 상속받고 싶은 욕망에서

그들의 딸과 결혼하고자 했다.

이들 부부는 마누엘의 포르투갈 왕국 내에 비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한 딸을 줄 수 없다며

결혼을 수락하지 않았다.

 

1496년 12월 포르투갈 내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선포되었다.

그들에게는 1년의 여유 기간이 주어졌다.

그전에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모두 강제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마누엘은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여 유대인들이 떠나는 길을 방해했다.

마감 날이 지나자 마누엘은 미처 떠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노예라고 선언하고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이들 중 다수 역시 비밀리 유대교 의식을 준수하는 마라노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1497년에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되고 말았다.

 

◇유대인, 플랑드르의 안트워프와 부뤼헤 등으로 향해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비교적 안전한 북해 연안의 저지대

곧 플랑드르의 부뤼헤와 안트워프로 향했다.

그곳에는 1290년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상업과 교역 그리고 모직물 산업을 발달시킨 곳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반겨 맞아 주었던 오스만제국으로 향했고

또 나머지는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 등으로 이주했다.

 

이주 중에 약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는 프랑스로도 이주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몽테뉴를 존재케 했다.

그의 어머니가 스페인계 유대인의 직계 후손이다.

모로코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유대인 정착촌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스페인을 떠나온 유대인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멜라(mellahs)”라고 하는 특별 구역에 격리되어 살았으며

유대인으로 인식케 하는 복장을 입어야만 했다.

한때 모로코에 2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았다.

 

◇스페인 애저요리의 유래

 

그 뒤에도 스페인 왕실은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마라노 무리가

여전히 몰래 유대교 관습을 지킨다고 보았다.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지금도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톨레도와 세고비야에는

새끼돼지를 구운 애저요리가 유명하다.

톨레도에는 축제 때 돼지고기를 먹는 행사가 있다.

이는 당시 마라노들이 공개석상에서 유대인들이 금기시 했던 돼지고기를 먹어 보임으로써

그들의 개종을 만천하에 알리는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애저요리(Cochinillo)는 생후 2주 된 아기 돼지를 통째로 구어서 먹는 스페인의 특선 요리로

접시로도 잘라질 만큼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일품이다.

세고비아 식당에서 애저를 접시로 자르는 모습. /위키피디아

그 뒤에도 종교재판을 피해 약 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추가로 스페인을 떠났다.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안트워프, 암스테르담 등지로 이주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경제력이 중부 유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사회의 몰락은

유대사 가운데 가장 중대한 사건 중 하나였다.

페니키아 시대에 이미 스페인 카디스 등에 유대인들이 진출한 기록이 있다.

적어도 솔로몬 시대부터 스페인에는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그곳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하며 유대인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유대인 추방으로 금융업과 유통업의 몰락

 

추방된 유대인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고급 인력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카스티야에서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과 왕실의 요직에도 진출해 있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 추방 결과

그들이 많이 살았던 주요 상업도시의 집세와 가게세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바르셀로나는 은행들이 대거 파산했다.

 

이로써 인구의 6.5%가 유대인이었던 아라곤 왕국

금융업과 상업이 몰락하다시피 타격이 컸다.

 

전성기에 300개의 작업장을 자랑했던 바르셀로나의 면직물 산업은

15세기 중엽에 10개 정도의 작업장만을 운영하는 초라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유대인 추방은 한마디로 고급두뇌와 핵심 인재의 유출이었다.

당시 의사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도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주 납세자도 유대인이었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마라노들도 유대인 티를 안내기 위해

전통적인 유대인 직업들을 버리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동시에 그들의 재능도 함께 땅에 묻어버렸다.

 

그 뒤 스페인포르투갈은 동인도 제도에서 후추와 향신료를 싣고 와도

유통망이 붕괴되어 소비자가 있는 북유럽으로 유통시킬 방도가 없었다.

동인도 제도로 싣고 갈 교역품도 구할 수 없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생산과 유통 기반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유대인 추방은 스페인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떠난 뒤 내수 부진과 더불어 국제교역 감소는 스페인 경제를 피폐케 했다.

이는 국고 수입 감소로 직결되어

스페인 왕국은 중남미에서 대량의 금과 은을 지속적으로 가져왔음에도

수 차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