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1] 이사벨 여왕, 1492년 유럽 대륙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다
1492년, 이 기점으로 중세와 근대 나뉘어
스페인 왕국, 이베리아반도의 통일인 ‘레콩키스타’를 성취
이슬람 세력 유럽 대륙에서 몰아내
동시에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루어
‘1492년’, 이해를 기점으로 중세와 근대가 나뉜다.
세계사적 분기점이 될 정도로 중요한 해였다.
과연 이해에 무슨 일이 있어 세계사의 분기점이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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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에 세계사적 사건 3가지가 동시에 발생했다.
스페인 왕국은 이베리아반도의 통일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성취해
이슬람 세력을 유럽 대륙에서 몰아냈다.
그와 동시에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루었다.
경제사에 있어 1492년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해에 스페인 왕국은 기독교 국가임을 천명하며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유대인이 사라진 스페인 왕국은 퇴조의 길을 걷게 되고
쫓겨난 유대인들이 몰려간 네덜란드는 중상주의의 꽃을 피우고
세계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세계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탄생과 유대 금융자본주의의 출현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유대인 추방령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탄생시킨 씨앗이 1492년에 심어졌다.
◇이사벨, 중세 역사를 주도한 이슬람을 몰아내어 유럽의 자존심을 회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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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는 재정복이란 뜻이다.
전성기에 비해 많이 약해진 이슬람 세력은 결국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까지 내주고
1492년 완전히 이베리아 반도에서 퇴각했다.
레콩키스타의 완성은 스페인 왕국의 군사적 승리에 머물지 않고
서구가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신호탄이었다.
역사라는 것이 본래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중세의 역사는 왜곡이 심한 편이다.
중세 역사의 주인공은 단연 이슬람이었다.
중세 780년간 유럽의 기독교 왕국들은 좌우에 포진한 이슬람 세력에 억눌려
꼼짝 못 하고 갇혀 살았다.
지중해 역시 이슬람의 바다로,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유럽 기독교 왕국들은 군사력, 경제력은 물론 과학기술과 문화 면에서도
이슬람에 크게 뒤처져 있었다.
당시 이슬람은 아직 유럽이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 모든 면에서 유럽보다 우월했다.
화약과 대포가 있어 군사적으로 훨씬 강했을 뿐 아니라
나침판이 있어 해상 운용 능력도 발달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종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인쇄술이 발달해 책과 도서관이 있었다.
‘화약, 나침판, 종이, 인쇄술’ 등 동양의 발명품을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던 이슬람이 잘 활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판국에 1492년 스페인 왕국이 유럽 대륙에서 이슬람을 몰아낸 레콩키스타는
유럽 기독교 세력들에 있어 자존심을 회복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492년에 레콩키스타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말고도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바로 ‘유대인 추방령’이다.
이 추방령으로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 수십만 명이 스페인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유대인 추방령은 두고두고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발생한 벨기에 부뤼헤(부뤼주)와 안트워프의 발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항구 재건과 플류트선의 개발,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만개, 항해조례와 영란전쟁, 명예혁명,
영국의 산업혁명과 전파, 신대륙의 부흥 등이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라는 키워드 없이는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사벨 공주와 페르난도 왕자의 세기적 정략결혼
이러한 세계적 사건들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의 정략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이 결혼으로 두 왕국은 연합체제를 구축해 스페인을 통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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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의 엔리케 왕은
자기의 이복여동생 이사벨 공주를 포르투갈 왕가와 결혼시켜
차기 왕위계승 후계자인 이사벨을 포르투갈로 보내 버리려 했다.
이를 눈치챈 이사벨은 선수를 쳐서 1469년 비밀리에 자신의 결혼을 주도해
바야돌리드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두 왕국은 1479년에 통일을 하게 되고 힘을 모아
이슬람 왕국과 20여 년에 걸친 국토회복 전쟁을 치러
이슬람 교도를 1492년 1월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냈다.
이른바 레콩키스타이다.
그리고 정복한 그라나다 성에서 같은 해 3월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으며,
여왕이 후원한 콜럼버스가 같은 해 10월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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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험난했던 결혼 과정을 보자.
1451년 카스티야의 공주로 태어난 이사벨은 명석하고 당찬 여성이었다.
1464년 왕과 귀족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무능한 엔리케 왕 대신 왕의 이복 동생 알폰소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결과는 3년간의 내란이었다.
1467년 알폰소가 14살의 어린 나이로 죽자 내란은 막을 내렸다.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알폰소의 지지 세력은 이번에는 알폰소의 누나 이사벨을 국왕에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사벨은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이복 오빠이자 국왕인 엔리케의 눈치를 살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반 엔리케파는 다음 계승자로 이사벨을 밀었고
힘에 밀린 엔리케 왕은 그녀를 일단 후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왕에게는 후아나라는 딸이 있어 왕은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불안을 느낀 이사벨은 세고비아로 올라가 은둔 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보호해 줄 강력한 결혼 상대자를 물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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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의 혼인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포르투갈, 아라곤 왕국, 프랑스가 제각기 결혼 상대 후보를 내놓았다.
엔리케는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선교사를 보내 알아본 다음, 동맹 상대로서는 포르투갈보다는
지중해 영해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등을 지배하고 있는
아라곤 왕국이 제격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결혼 상대자로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를 마음에 두었다.
18세의 이사벨은 고심 끝에
혼자서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17세의 페르난도 왕자를 배우자로 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백년 전쟁에서 승리한 신흥강국 프랑스는
주위에 강력한 통일 스페인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구나 당시 세력가들이었던 카스티야의 영주들조차
강력한 왕권주의자인 페르난도를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둘은 근친 간이었다.
당시 유럽 왕족들은 왕족들 간의 결혼으로 그리 멀지 않은 친척들이 많았다.
그러나 가톨릭은 원칙적으로는 근친 간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결혼하려면 교황의 특면장이 필요했다.
이사벨은 자기의 지지자인 톨레도 대주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이사벨은 몰래 결혼식장인 바야돌리드로 향했다.
급보를 접한 엔리케 왕은 이들의 결혼을 막으려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위기의 순간에 톨레도 주교의 군대가 그녀를 구출했다.
그녀는 무사히 지지자들의 도시인 바야돌리드로 입성했다.
그녀의 손에는 교황의 특면장이 들려있었다.
후일 이 특면장은 톨레도 대주교가 위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르난도 왕자는 결혼식 며칠 전에야 상인으로 변장한 몇몇 측근들과 함께
아라곤 왕국의 수도 사라고사를 출발했다.
그는 주로 밤을 이용해 오는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바야돌리드에 도착했다.
1469년 10월 19일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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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엔리케 왕은 자신의 허락 없이 페르난도와 결혼한 이사벨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며
왕위계승권 박탈을 선언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사람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안을 느낀 카스티야 귀족들의 세력도
갈수록 커졌다.
이 와중인 1474년 엔리케 왕이 돌연 사망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23세의 이사벨은 즉각 카스티야의 왕은 자신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쪽에서는 엔리케의 딸 후아나가 왕위 즉위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후아나의 남편이자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 국경을 넘었다.
5년간의 내전 끝에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포르투갈 연합군을 격파했다.
같은 해 남편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자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 곧 스페인 왕국이 탄생했다.
◇당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나라, 스페인 왕국
로마제국 이후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한 제국이 스페인 왕국이다.
이러한 영광 뒤에는 막강한 경제력의 유대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14~15세기에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나라가 스페인이다.
당시 스페인 인구가 700만이었으며
이 가운데 7%인 약 50만 명 정도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톨레도와 같은 주요 도시의 경우에는 인구의 1/3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도시가 44개에 이르렀는데
이는 스페인 방방곡곡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스페인 왕실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당시 부유층이었던 유대인들의 재정적 도움이 절실했다.
또 혼란기 국가를 이끌어 가기 위해 능력 있는 유대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이들을 상업, 무역업, 수공업은 물론 의술, 통역 등에 활용했다.
또 세무, 재정, 관리 부문에도 중용하여 중요한 일들을 맡아보게 했다.
부(富) 이외에도 그만큼 그들의 재능과 정직성이 뛰어났다는 증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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