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48]
“방위산업에 國運 걸려” 軍에서 대학보다 먼저 컴퓨터 가르쳤다
[상] 사막의 이스라엘이 세계적 창업국가로
1881년 3월 러시아 황제가 암살되었는데,
암살자들에게 유대인 처녀가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러시아는 이듬해 반유대법을 공포해,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일정 지역과 게토에 갇혀 살게 했다.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나
약 4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이를 ‘포그롬(Pogrom)’이라 불렀다.
당시 유대인들이 서유럽과 미국으로 많이 탈출했다.
런던에 15만, 빈에 7만 명 등의 유대인들이 몰려들면서
서유럽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 본고장 프랑스에서조차
무고한 유대인 장교를 간첩으로 모는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취재하던 테오도어 헤르츨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면서
프랑스의 에드몽 로스차일드는 1887년 팔레스타인 땅을 비밀리에 사들여
유대인들이 농사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이주민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의 80%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군대가 곧 기술 인재 양성의 요람
그러나 유대인 이주자들에게 아랍계의 테러와 공격이 가해졌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909년 집단농장 키부츠를 창설하고
한 손에는 곡괭이,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고 농사와 전투를 동시에 수행했다.
키부츠 구성원들은 모든 결정을 전체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키부츠 내 모든 재산과 생산수단은 공동 소유로, 대신 필요한 모든 것이 배급되었다.
공산주의 방식이다.
공동 육아와 공동 교육이 시행되었다.
자녀들은 영유아 때부터 또래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공부한다.
그 무렵 키부츠 구성원들은
이스라엘이 건국되면 스탈린식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1921년에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녀를 가정에서 양육하는
협동조합 성격의 집단농장 모샤브가 출현했다.
이후 키부츠와 모샤브가 수백 개 규모로 커지면서 이들이 건국 운동의 중심이 되어
이스라엘은 계획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출범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건국 이전에 대학을 먼저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해,
1912년 항구도시 하이파에 테크니온 공대의 초석을,
1917년 예루살렘에 히브리대학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인구는 고작 5만6000명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개교 전부터 히브리대학에서 히브리어로 강의했다.
두 대학이 1925년 같은 해에 캠퍼스를 완공하고 개교하자 그는
테크니온 공대의 초대 학장도 맡았다.
이후 테크니온 공대 졸업생들은 건국 후 벌어질 전쟁에 대비해
비밀리에 집과 직장 지하에서 무기를 제작하여 키부츠와 모샤브에 공급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당시 인구는 80만6000명이었다.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에 정복당한 지 2011년 만에 나라를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건국 선언한 그날 밤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이튿날 아랍 5국이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이스라엘군 2만7000명과 예비군 9만 명이 결사 항전으로 맞서 싸웠다.
여자들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20일 넘게 벌어진 전투 끝에 결국 유대인들은 나라를 지켜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방위산업 육성에 국운을 걸었다.
1952년에 첩보부대부터 설치했다.
그리고 유대인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이스라엘 군수산업체(IMI)를 세웠다.
1953년 이스라엘은 항공산업체(IAI)을 설립하여 6년 만에 비행기를 생산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하이테크 산업은 방위산업과 궤를 같이했다.
IMI는 다양한 무기를 생산하며 위성 발사에 성공해
이스라엘 최대 하이테크 산업체가 되었다.
그중 무인 원격조종 소형비행기가 유명하다.
배낭에 넣고 다닐 정도의 초소형 무인비행기는 GPS 시스템을 이용해 원격조종 된다.
이집트와 2차 중동전쟁 뒤 이스라엘은 군을 ‘기술 전문조직’으로 바꾸어 나갔다.
군이 1959년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대학에 컴퓨터학과가 생긴 것은 이로부터 10년 후였다.
그만큼 군이 앞서 나갔다.
1959년 병기개발청 ‘라파엘’은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공대공 미사일을 개발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1963년 민간자본으로 원전을 완공해 핵기술 보유국이 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민간 컴퓨터 기업들이 라파엘의 미사일 제조 기술을 활용해
세계 최고 수준의 능동형 레이더, 암호화 시스템, 해킹 기술 등을 탄생시켰다.
그 뒤 미사일 기술은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었다.
일례로 바이오벤처 갈릴메디컬은
미세 침으로 전립선암 수술을 순식간에 끝내는 의료제품을 개발했다.
그 핵심 기술이 바로 미사일 발사 후 발사대를 급랭시키는 기술에서 온 것이다.
그 뒤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패는 제공권 장악에 있다고 보고,
미국이 제공하기를 거부한 관성유도장치, 대용량 컴퓨터, 우주로켓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은 물 때문에 벌어졌다.
사막성 기후의 이스라엘은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물 관리가 가장 중요한 국가 전략 목표였다.
그들은 건국 이전인 1937년 수자원 회사부터 설립했다.
이스라엘 최대 수자원인 갈릴리호수와 요르단강은 국민의 목숨 줄인데,
시리아가 갈릴리 호수로 내려오는 물길을 막는 댐을 골란고원에 건설하려 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년 수심이 얕아지는 갈릴리 호수로 들어오는 물길을 막는 댐 건설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공격했다.
이에 대해 이집트는 5월 시나이반도를 침공해
인도양으로 나가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해상로 아카바만을 봉쇄했다.
나세르가 전쟁을 시작한 데는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무장을 하기 전에 끝장내야겠다는
강박 심리가 작용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6월 5일 레이더망을 피해 초저공 비행으로 지중해를 멀리 우회하여
이집트 전투기 410대와 이튿날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전투기 416대를 파괴해
아랍 공군력을 초토화했다.
그 뒤 이스라엘은 기갑부대를 투입해 골란고원 수원지 일대를 정복하고 전쟁을 끝내
이를 ‘6일 전쟁’이라 부른다.
3차 중동전쟁도 물 때문에 발발
이스라엘은 1965년 전국 수도망을 완성했다. 그러나 농업용수는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였다. 한 키부츠가 같은 해 ‘네타핌’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히브리어로 ‘물방울’이란 의미의 이 회사는
‘점적 관수(Drip irrigation)’ 기술을 개발해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나갔다.
호스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조금씩 나오도록 컴퓨터로 제어해
물이 작물 뿌리에만 스며들게 했다.
이를 개발한 사람은 이스라엘 수자원공사 엔지니어였던 ‘심카 블라스’다.
그는 어느 날 이웃집 수도 파이프가 새는 걸 보고 이를 알려주려고 방문했다가
그 집 마당의 나무들이 물을 주지 않는데도 잘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에 힌트를 얻어 이 기술을 개발했다.
물에 대한 집념은 이후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기술의 경제성도 확보했다.
㎥당 평균 1~1.3달러였던 해수 담수화 비용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50센트로 낮추어
모자라는 물 문제를 해결했다.
또 하수도 물을 농업용수로 바꾸는 폐수 재활용률도 75%에 달해
광야를 옥토로 바꾸는 녹색혁명도 이루어 식량 자급률이 무려 95%다.
이스라엘에는 70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있다.
이 중 700여 개가 수자원 이용의 효율 개선 방안을 찾고 있다.
물에 관한 한 세계 최강이다.
[세파라디·아슈케나지]
같은 유럽 유대인이라도 스페인·독일계로 나뉘어… 피부색도 중동인과 달라
유대인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세파라디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아슈케나지이다.
중세에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은 이베리아반도이다. 이들을 세파라디라고 불렀다.
‘스페인계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당시 유럽 대륙 내 물류의 수송 경로였던 라인강 변에
상업과 유통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이 몰려 살았다. 이들을 아슈케나지라 불렀다.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들이 라인강 변을 타고 진군하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아슈케나지들이 대부분 동구와 러시아로 피난 가서
슬라브 민족과 같이 살았다.
이들은 오랫동안 슬라브 민족과 함께 살면서 피가 섞여
피부색이 검붉은 중동인에서 하얀 피부로 변해 세파라디와 쉽게 구별된다.
19세기 말 무렵 세계 유대인 인구 1127만 명 중 러시아에 가장 많은 390만 명이 살았고,
다음으로 폴란드에 131만 명, 헝가리에 85만 명이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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