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세상]

[우크라이나] ‘드니프로강의 기적’

colorprom 2022. 9. 26. 22:26

[기자의 시각] ‘드니프로강의 기적’

 

입력 2022.09.26 03:00
 

지난 7월 초 스위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에 우리 정부가 참여해

많은 기사가 쏟아졌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가 있다.

당시 우리 정부 대표로 이도훈 외교부 차관과 오성익 국토부 과장 등이

쿠브라코프 우크라이나 인프라 장관과 회동했을 때

묵직한 선물 하나가 우크라이나 측에 전달됐다는 것이다.

 

대표단이 조용히 전했던 선물은 ‘더 코리아 스토리(The Korea Story)’라는

808쪽짜리 영문책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화를 설계하고 이끈 국내 1호 ‘테크노크라트’

고(故)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저서다.

 

그는 이 책에 한국 경제·산업 발전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책은 정책 결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사례별로 소개하며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시아 변방의 소국이 산업 강국으로 탈바꿈한 건

운이 좋아서도 다른 나라 도움을 받아서만도 아니란 걸 깨닫게 한다.

 

오 전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오 국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막상 정책 결정 때는 ‘무엇이 최선이냐’를 놓고

대통령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치열하게 벌였다고 한다.

이렇게 힘들게 찍어간 점이 이어져 지금의 한국이 됐다는 것이다.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화를 설계한 국내 1호 ‘테크노크라트’
고(故)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저서 'The Korea Story'.
이도훈 외교부 차관과 오성익 국토부 과장이 지난 7월 우크라이나 전후 국가 재건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에서 쿠브라코프 우크라이나 인프라 장관에게 전한 '선물'이 바로 이 책이다. /노석조 기자

 

이 책 선물 이야기는 오 과장이 출장 복귀 며칠 뒤 7월 중순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ALC) 세션에서 털어놓았다.

이 자리엔 우크라이나 국회의원들과 주지사 등이 참석했다.

 

객석에 있던 오 과장은 70여 년 전 분단 상황에서 자신의 조부가 희생된 사연을 꺼내며

우크라이나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남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경험이 우크라이나가 전후(戰後) 재건 사업을 할 때 도움이 됐으면 해

‘한강의 기적’ 이야기를 담은 ‘더 코리아 스토리’라는 책을 선물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인사뿐 아니라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 등

객석에 있는 여러 나라 정·관·재계 인사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가 고교 세계사 교과서에 한국의 발전 과정을 넣도록

교과서 서술 지침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전까지 이 나라 세계사 교과서에 ‘한국’은 없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의 아픔을 겪고,

국방의 중요성, 국가 재건의 절실함을 몸소 깨달으면서

한강의 기적’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 한국이 당한 북의 남침을 승인·지원한 장본인이 스탈린이고,

우크라이나 침략을 감행한 당사자는

‘21세기 스탈린’으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단기간에 한반도가 적화될 것이라 오판했던 스탈린처럼 푸틴도 개전 때 계획과 달리

전쟁이 길어지고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가 거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도를 펼쳐봤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도시를 가르는 드니프로강이 있다.

반세기 전 한강의 기적처럼 ‘드니프로강의 기적’이 실현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