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세상]

[일본][취업빙하기세대] “日 민주주의가 패배했다”

colorprom 2022. 7. 19. 16:42

[특파원 리포트] “日 민주주의가 패배했다”

 

입력 2022.07.19 03:00
 
 

아베 신조 일본 전 총리가 세상을 뜬 지 벌써 열흘이지만,

일본에선 여전히 다들 아베 이야기다.

 

아베의 국장(國葬)을 전격 결정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번 사건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분노했다.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지만, 막상 총격범 야마가미 데쓰야(41)를 향한 비난은 듣기 힘들다.

오히려 은근한 동정 여론이 모인다.

이번 사건의 독특한 점이다.

 

8일(현지시간) 일본 나라현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총기로 저격한 남성이
범행 직후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하고 있다.
아베 전 총리를 사망케 한 용의자 야마가미 데쓰야는 전직 해상자위대원으로 3년간 장교로 복무하다
2006년 전역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일본 언론이 전하는 야마가미의 일생엔 곡절이 많다.

당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명문 국립대 출신 사업가, 부모와 친척 모두 명문대 출신 혹은 전문직 종사자였다.

하지만 부모 사이는 원만치 않았고, 부친은 야마가미가 어린 시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종교에 깊이 빠진 모친이 집안 재산을 내다팔며 가계는 급격히 기울었다.

야마가미도 지역 명문고에 진학했지만 경제적 이유로 4년제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그의 고교 졸업 앨범 사진 밑엔 ‘모르겠다’라는 한마디가 적혀 있다.

저마다 자기 장래 희망이나 계획을 적는 난이었다.

 

시대의 운도 따르지 않았다.

그가 사회 초년생이던 2000년대 전후는 대졸 취업률이 역대 최저를 헤매던 때였다. 

흔히 말하는 ‘취업 빙하기’ 끝물 세대다.

각종 취업용 자격증을 땄지만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관두기를 반복했다.

 

취업 빙하기 시기 사회 초년생을 보낸 일본의 30대 후반~40대 중반 세대엔

야마가미와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다.

약 100만명이 여전히 장기 실업 혹은 비자발적 비정규직 상태에 있다.

20대 초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지 못한 대가를 평생 치르는 셈이다.

 

아베는 2019년 참의원 선거 직전 취업 빙하기 세대 지원책을 발표했다.

3년간 정규직 30만명을 늘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인기를 의식한 구호에 그쳤고, 목표는 애초 허황된 것이었다.

 

야마가미에겐 취업을 못한 고통과 경제적 문제, 지병·장애로 고생하던 형의 자살 등

불행이 잇따랐다. 결혼도 못 했고 인간관계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요즘 일본에서 쓰는 말로 ‘무적(無敵)의 사람’이었다.

잃을 게 없으니 무서울 것도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분노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개인의 불행인 동시에 사회문제다.

 

그의 소셜미디어 계정에는

사회에 도움을 적극 요청할 수 없었던 자기 처지에 대한 회한이 드러나 있다.

“범죄는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야마가미에게 동정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댓글이 달리는 이유다.

 

야마가미는 선거·언론·소송 등 제도를 통한 문제 해결 대신 끝내 폭력을 택했다.

우노 시게키 도쿄대 교수는 이를 두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 민주주의의 패배(아사히신문)”라고 지적했다.

 

젊은이들이 취업 빙하기 속에서 분노를 느끼는 사정은 한국도 다르지 않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패배하는 일이 없길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