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28] 마지막 ‘군사 천재’로 불린 사나이의 쓸쓸한 퇴장…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1815년 3월 7일 이제르강과 드라크강이 합류하는 알프스 기슭의 프랑스 남동부 도시 그르노블에
돌연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남쪽에서 한 무리의 무장 세력이 도시를 향해 거침없이 행군해 오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는 듯 프랑스 제5연대가 외곽에 전투대형을 갖췄습니다.
한 남자가 말에서 내리더니 제5연대 병사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 눈길이 이 남자에게 쏠렸습니다. 그는 이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라도 지금 방아쇠를 당긴다면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의 황제를 죽여라. 너희가 원한다면.”
그 순간 울려퍼진 것은 총소리가 아닌 병사들의 환호성이었습니다.
“황제 만세!” “황제 만세!” 병사들은 달려가 그의 옷을 만지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 100일 천하
나폴레옹,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한 뒤 프랑스 황제에서 물러나 지중해 엘바섬에 유배됐던 그는
이렇게 유럽에 자신의 귀환을 알렸습니다.
열흘 전인 2월 26일 탈출에 성공, 이틀 뒤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했고
파죽지세로 파리를 향해 북진했습니다.
3월 10일에 리옹에 도착했고, 20일에는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100일 천하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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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황제의 마차가 도착한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지자
튈르리 궁 앞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다시 병력을 소집했습니다.
6월 초엔 병력 규모가 20만명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문제는 지휘관과 참모들이었습니다.
그에겐 더 이상 능력있는 부하 지휘관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치명적 약점은 최후의 전투인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전투가 그의 뜻대로 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도 발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은 3월 17일 각각 군인 15만명을 동원해
나폴레옹에 맞서기로 결의했습니다.
웰링턴은 벨기에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벨기에군 등을 모아 군대를 정비했습니다.
프로이센도 움직였고, 오스트리아도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처음엔 싸울 생각이 없었던 듯 합니다.
그는 유럽 각국에 평화와 공존을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폴레옹을 겪을대로 겪은 유럽은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이제 양측의 대결은 ‘필연’으로 치달았습니다.
두 달여만에 군대를 재편한 나폴레옹은 곧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공개적으로 알렸습니다.
6월 11일 그는 하원 의원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오늘 밤 나는 선발대로 떠납니다.
적의 움직임을 보건대 내가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국을 지키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는 모든 병력을 데리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왕당파 등 국내 반란이나 소요에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워털루… 나폴레옹의 잇따른 실수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병력 규모에서 열세였습니다.
나폴레옹군은 보병 5만명, 기마병 1만5000명 등을 포함해 모두 7만2000여명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연합군은 약 12만명이었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하노버 등에서 온 병력을 지휘하는 웰링턴 휘하에 6만8000명이 있었고,
프로이센의 블뤼허는 5만명을 이끌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 부대 25만명이 라인강 중류에 집결해 있었고,
라인 강 상류에는 2만5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간단하고 명확했습니다.
웰링턴 부대와 블뤼허 부대 사이로 치고 들어가 두 부대를 갈라놓은 후 각개격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기려면 일사분란하고 빠르고 정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이 된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그의 부대가 보여준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몇 번의 결정적 순간에 나폴레옹은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잇따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운명이 나를 버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정적인 성공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과감히 시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적절한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①첫번째 실수 : 브뤼셀 무도회 때 기습 기회 놓쳐
6월 15일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은 부대를 주둔시킨 뒤 저녁 때
리슈몽 공작부인이 개최한 무도회에 참가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철의 공작’ 웰링턴은 사교계 일을 아주 중요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날 밤 그의 군대는 전투 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이미 벨기에 국경을 넘은 상황이었습니다.
완벽한 기습 공격의 기회를 잡은 것이죠.
만약 나폴레옹이 웰링턴을 기습했다면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웰링턴 부대는 일부 프랑스군과 조우했지만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채
대격전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②두번째 실수 : 전초전 승리 후 프로이센군 추격 안해
16일 전초전 성격의 전투가 리니에서 벌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날 프로이센의 블뤼허 부대를 만났습니다.
블뤼허에겐 악몽같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영국군과 합류하기 전에 나폴레옹 군대를 만났으니까요.
반면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을 따로 따로 상대하겠다는 나폴레옹으로선 쾌재를 부를만 했습니다.
결과는 역시 예측 그대로였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완승.
심지어 프로이센의 사령관 블뤼허는 허벅지에 부상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다음 순간에 발생했습니다.
패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완전히 격멸했어야 했는데 나폴레옹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전의를 상실해 전장(戰場)에서 물러날 것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이 부분을 나폴레옹의 가장 뼈아픈 실책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후배 몽고메리 장군은
“나폴레옹은 리니 전투 후 전군을 이끌고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한동안 효과적인 전투력을 지니고 전장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블뤼허 군대를 섬멸해버렸어야 했다”
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라면 불과 이틀 후에 블뤼허가 워털루로 돌아와 웰링턴과 합세,
나폴레옹을 참패로 몰아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까요.
③세번째 실수 : 병력 분산
나폴레옹은 주력을 이끌고 본인이 직접 블뤼허를 추격하진 않았지만,
뒤늦게 그루쉬 원수에게 병력 3만명을 주며 블뤼허를 쫓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습니다.
총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40% 가까운 전력을 떼어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본 게임인 워털루 전투 때 나폴레옹에게 이 병력이 있었다면
웰링턴은 절대로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루쉬는 결국 이틀 동안 들판만 헤매다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④네번째 실수 : 망설임, 또 망설임
6월 18일. 밤새 많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땅이 온통 질퍽거렸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이 늦춰졌습니다.
원래는 새벽에 작전을 개시한다고 했는데, 오전 9시로 연기됐습니다.
장병과 대포가 진창 속에 빠질 것을 우려해
해가 나고 땅이 좀 더 굳어질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9시가 돼도 공격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오전 11시 30분이 돼서야 드디어 공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초 계획보다 5~6시간 이상 늦춰진 것이었습니다.
이 ‘잃어버린 시간’은 나폴레옹에겐 큰 아쉬움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격을 연기함으로써 블뤼허가 도착할 시간을 벌어준 꼴이 됐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한번 결정한 작전은 절대 변경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날은 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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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습니다.
중간에 나폴레옹이 승기를 잡은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나폴레옹은 핵심 부대 투입을 망설였습니다.
사실 웰링턴은 나폴레옹 만큼 풍부하고 과감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확실한 방어망을 구축해 아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전한 뒤
적 전투력이 떨어진 때를 노려 공격을 가하는 식이었습니다.
워털루 전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공격을, 웰링턴은 수비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후 3시쯤 몸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네 원수가 약간의 승기가 보이자 전체 기병대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고,
이 기병대가 포병과 육군 지원없이 돌격하는 바람에 역공을 당해 궤멸하고 말았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프랑스군은 웰링턴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 워털루에 도착한 프로이센군이 연합 공격에 나섬에 따라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됩니다.
밤10시쯤 웰링턴과 블뤼허가 만나 향후 추격전은 지친 영국군 대신
체력이 충분한 프로이센군이 맡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워털루 전투는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정말 운좋게 승리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계속되는 여러 실수 중 단 하나만이라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날의 승패는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전투에 대해 연합군이 “간발의 차로 간신히” 이겼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전투에서 이겼어야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반면 승리한 웰링턴은
“나폴레옹은… 구식으로, 종대 대형으로 진격했고, 구식으로 패주했다”고 평가했습니다.
◇ 세인트헬레나
1815년 8월 7일 나폴레옹은 “내 운명을 완성하겠다”며 영국의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0월 15일 아프리카 대륙에서 1870km 떨어진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섬 생활에 대해선 많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820년 7월 들어 나폴레옹의 병세가 완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위암이었다는 말도 있고, 간염의 일종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10월 4일에는 이웃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거의 실신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왔고
며칠 후에는 뜨거운 욕조에서 나오다 의식을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침대가 내게 아주 달콤한 공간이 되었소.
이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오.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 내가 얼마나 쇠락했는지.”
1821년 4월 13일 그는 긴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그는 옛 병사들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저축한 2억 프랑을 남기겠다고 했습니다.
이 돈은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5월 4일 밤부터 맥박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는 혼수 상태에 빠졌고 오전 5시 그의 호흡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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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헬레나에서 인생을 되돌아본 나폴레옹.
그는 워털루 전투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요.
그는 “패자의 명예도 타격받지 않았고, 승자의 명예도 드높아지지 않은 이상한 승리였다.
패자는 그 파괴를 뛰어넘어 기억될 것이고, 승자는 어쩌면 잊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나폴레옹의 예측이100% 맞아 떨어진 건 아닙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이긴 덕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계속 정치에 몸담고 있다가 1828~1830년 영국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웰링턴은 그저 대영제국 건설에 기여한 영국의 한 장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나폴레옹은 웰링턴이 없었어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이는 나폴레옹 사후 세상이 보인 반응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구나 평전, 에세이는 무려 60만 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후배 군인들은 거의 존경과 흠모 수준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영국의 2차 대전 영웅인 몽고메리 장군은
“그렇게 뛰어난 한 명의 군사적 천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세상에는 그러한 천재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상에 군인이 존재하는 한 그는 가장 뛰어난 장군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걸 미리 예견했던 것일까요.
그는 세인트헬레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
그리곤 자신의 삶에 대해 한마디 던졌지요.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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