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에서 온 편지][27] “죽음의 신은 내가 침대가 아닌 전쟁터에서 죽기를 바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러시아 침략을 받은 지 2주일째가 됐지만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예프)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개전 1~2일 만에 함락될 것이란 예측을 깨버렸습니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의 친러 반군 무장 봉기 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횡포를 눈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굴욕적이었지만 우크라이나는 자신을 지켜낼 힘이 없었고, 러시아 정규군이 아닌 반군조차 제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군대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출신의 올레나 쉐겔(41) 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를 인터뷰 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을 개시한 날입니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2시쯤 끝났는데 그때서야 러시아의 공격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외신을 접하자마자 쉐겔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다 전화를 끊었습니다.
인터뷰 때 쉐겔 교수가 말한 바에 따르면 지난 2010년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제5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의 꼭두각시’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재임 기간 군대를 무력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병력을 크게 줄이고, 복무기간을 2년 반→2년→1년반→1년으로 줄였고 막판에는 6개월로 단축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의 친러·반유럽 행각에 분노한 시민들이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그를 축출했지만, 러시아가 즉각 크림반도 합병 등 무력 행사에 나섰지요.
그 이후 우크라이나는 좀 더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합니다. 쉐겔 교수는 그런 결과 우크라이나가 8년 전처럼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지난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첫 헌법에 자신들이 중립국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지역의 반란을 계기로 나토(NATO) 가입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헌법에 넣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추진했기 때문에 ‘정당방위’ 차원에서 공격을 단행했다는 푸틴의 말은 앞뒤 인과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새빨간 거짓말인 셈이지요.
◇ 전쟁은 보급이다
며칠 새 가장 눈길을 끄는 외신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 북방 벨라루스 쪽에서 남하하고 있는 러시아군 행렬의 ‘달팽이 속도’입니다. 선두는 키이우 북방 25km 지점까지 왔는데(지난 3일 현재) 후미가 60km 이상 후방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동 속도가 하루 평균 2km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지난달 28일부터 위성에 포착된 이 행렬은 탱크와 장갑차, 자주포, 연료와 식량 등을 나르는 보급 차량 등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약 이 무기와 장비들이 계획된 일정에 따라 전진하고 최전선에 배치됐다면 지금쯤 키이우는 러시아군 손에 들어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 BBC 등 외신들은 이런 상황을 거의 미스테리 수준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해석은 분분합니다.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은 병참 문제입니다. 연료 등이 전체 행렬에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일부 러시아 장병들이 참전을 꺼려 차량 등에 고장을 내거나 바퀴에 구멍을 내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원인이 무엇이든간에 미군이 이라크전 등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라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습니다.
병참은 인류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나폴레옹의 몰락에 마침표를 찍은 워털루 전투의 영웅, 웰링턴도 바로 이 병참 분야의 귀재였습니다. 웰링턴의 본명은 아서 웰즐리인데, 1809년 상원의원 임명과 함께 웰링턴 자작에 서임됐고, 1812년에 웰링턴 백작·후작에 잇따라 서임된 데 이어 1814년 웰링턴 공작에 오르게 됩니다.
◇ 동갑내기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둘 다 1769년에 태어났습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두 전쟁 영웅은 46세가 될 때까지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곤일척 한판 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을 석권하는 등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가던 때 웰링턴은 향후 대영제국이 가장 애지중지한 식민지 인도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리면서 명성과 군사적 역량을 쌓았습니다.
웰링턴은 아일랜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튼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수학과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15세에 학교를 졸업한 뒤 1787년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에 앞서 이런 유명한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 학교의 운동장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국가의 인재를 길러내는 영국 사립학교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표적인 말로 널리 퍼졌는데, 실제로 웰링턴이 이 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이튼 재학 시절 외톨이 성격을 가졌던 웰링턴은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이튼에는 운동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위관급 장교 시절 웰링턴은 그리 잘 나가는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국 육군 장교들 중에선 집안 배경 등을 이용해 입대하고 고속 진급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웰링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티를 좋아했고, 사교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다 1793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사건’이 발생합니다. 웰링턴이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의 집안에서 그의 청혼을 딱 잘라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연인의 오빠인 롱포드 백작은 웰링턴에 대해 “빚도 많은 주제에 장래도 형편 없는 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마추어 바이올린니스트’ 웰링턴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바이올린을 불태운 뒤 ‘전력을 다해’ 군 경력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기회의 땅, 인도
웰링턴은 무엇보다 군 장병을 보살피고 훈련시키는 일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전투를 위해 조달과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자금과 수송, 군수품 보급은 웰링턴의 유능한 병참감 케네디가 맡았는데, 그는 옷과 음식, 막사, 담요, 장화와 급여 등을 항상 충분하게 조달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군과 달리 영국군은 군수품 참고 시스템을 활용했고, 지방 생산품을 돈을 주고 조달했습니다. 이런 체계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는데, 심지어 그가 1814년 프랑스 남부 지역에 진출했을 때는 프랑스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웰링턴은 또 장병들의 과음을 엄격하게 다스렸고, 병사들이 탈선을 하지 않도록 기강을 강하게 세웠다고 합니다.
웰링턴은 적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내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상당 부분, ‘언덕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늘 연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대단히 유능한 정보 조직을 구축했고, 그의 정보원들은 그물처럼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깔렸습니다.
그런 그에게 인도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는 1796년 인도에 도착했는데 그를 이어 형 리처드 웰즐리가 인도의 네번째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이들 웰즐리 형제는 대영제국이 인도 대부분을 손에 넣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인도는 무굴 제국이 쇠퇴하면서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었고, 전국 곳곳에 신생 국가가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그 중 인도 중북부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마라타 동맹과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은 대영제국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영국은 마이소르를 첫번째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마이소르의 이슬람 통치자 티푸 술탄은 자신을 ‘타이거 왕자’라고 불렀는데, 그는 영국인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그의 군대에는 프랑스 고문단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이소르 타도에 웰링턴이 선봉에 섰습니다. 이제 대령이 된 웰링턴은 영국의 동맹국인 하이데라바드의 군대와 함께 티푸의 기병대와 보병을 공격해 격퇴했습니다. 이 공로로 웰링턴은 마이소르의 총독이 되고, 상금으로 4000파운드를 받았습니다. 다시 영국 사병은 7파운드를 받았다고 합니다.
마라타 동맹은 절대 쉽지 않은 상대였습니다. 마라타는 인구 4000만명을 지배하는 5개 힌두족의 연합체였습니다. 당시 인도에서 세력이 가장 크고 막강했습니다. 준장으로 진급한 웰링턴 지휘 아래 1803년 군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그해 8월 양측간 전투가 시작됐고, 9월 23일에 벌어진 아사예 전투는 각종 전쟁사에 등장하는, 그리고 인도의 운명을 결정한 전쟁이었습니다. 결과는 영국군의 승리. 아사예 전투는 웰링턴이 수행한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두 번의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워털루 전투이고요. 이 전투의 승리로 웰즐리 형제들은 인도에서 대영제국의 크기를 4배로 확장시켰습니다. 이들의 성취에 영국은 환호했습니다. 웰링턴은 기사 작위를 받게 됩니다. 인도에서 9년을 보낸 뒤 웰링턴은 1805년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존재감이 커진 웰링턴이 이베리아 반도에 투입된 건 1808년 입니다. 그해 8월 웰링턴은 병력 1만3000명을 거느리고 포르투갈에 상륙했습니다. 비메이로에서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이듬해에는 사망한 존 무어 경의 뒤를 이어 이베리아 반도의 총 사령관에 임명됐습니다. 그의 휘하에는 2만1000명의 장병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8만병까지로 불어나게 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영국군은 한 때 나폴레옹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는 바람에 크게 위축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이 돌아간 뒤에는 다시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프랑스군과의 대결은 전적으로 웰링턴이 이끌게 됩니다.
1810년 9월 웰링턴은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갖게 됩니다. 7만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는 프랑스 마세나 장군에 맞서 후퇴 작전을 벌이다, 부사쿠 인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이듬해까지 양측은 대치했는데 영국군은 군수품이 충분했지만, 프랑스군은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사기가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1811년 봄 마세나가 퇴각하자 웰링턴은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와 이듬해 알메이다 요새, 시우다드로드리고, 바다호스 국경 지역을 탈환했고, 1812년에는 마드리드 서북부 살라망카 전투, 1813년에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 비토리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게 됩니다. 웰링턴은 내친김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1814년 4월 툴루즈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 러시아의 소모전
나폴레옹은 인생을 통틀어 주요 전쟁에서 세 번 졌습니다. 러시아 대원정(1812)과 라이프치히 전투(1813), 워털루 전투(1815) 등입니다. 웰링턴이 맹활약한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프랑스군은 군사적으로 실패했지만 이는 부하들의 패배였고, 당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베리아에서의 패배를 사소하고 지엽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나선 건 그가 6년 전(1806년) 내린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이 칙령 때문에 온 유럽이 고통을 겪었는데, 남보다 앞서 반기를 든 것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러시아 등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특히 러시아를 정면으로 겨냥했습니다. 나폴레옹 눈에 프랑스의 최대 적은 영국인데, 그 영국은 러시아를 무릎꿇리면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쪽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나면 에스파냐는 즉시 몰락할 것이오.”
나폴레옹은 모든 유럽 대륙의 군사를 소집했습니다. 독일 드레스덴으로 가서 독일의 모든 왕족을 소집했습니다. 장인인 오스트리아 프란츠 황제까지 불러들였습니다. (참고로 나폴레옹은 애를 낳지 못한 조강지처 조제핀과 이혼한 뒤 1810년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루이즈와 재혼했습니다.) 프로이센 왕은 늦게 왔는데, 러시아와 영국이 말렸지만 나폴레옹의 소집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총 70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모였습니다. 오스트리아가 3만명, 프로이센이 2만명을 내놓은 것을 비롯해 이탈리아와 바이에른, 작센, 폴란드 등도 지원에 나섰습니다. 유럽 각국 징집군이 32만명, 프랑스군이 35만6000명이었습니다.
원정은 그해 여름 시작됐습니다. 폴란드와 러시아 국경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원정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쟁 천재 나폴레옹은 곧 당황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불꽃같은 전투를 원했는데 러시아군은 간혹 시시한 싸움을 걸어올 뿐 계속 물러나기만 했습니다. 러시아 민간인들은 도망을 치면서 식량을 모두 가져가거나 남는 건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9월 15일 모스크바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텅빈 유령 도시 같았습니다. 나폴레옹은 크렘린에서 알렉산드르 황제의 항복 사절을 기다렸지만 상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16일에는 모스크바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러시아의 작전은 한마디로 초토화 작전이었습니다. 게릴라전으로 원정군의 힘을 빼고 계속 뒤로 빠지면서 상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소모전을 펼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나폴레옹에건 악몽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원정군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여름에 출발한 원정군은 러시아의 추위를 이겨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먹을 것도 다 떨어졌습니다.
10월 19일 나폴레옹은 15일분의 식량만 가지고 모스크바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수 많은 병사들이 병이나 굶주림, 추위에 사망했습니다. 곳곳에서 러시아 복병을 만나 전사자가 속출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자랑스런 ‘그랑드 아르메’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나폴레옹은 1812년 12월 18일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아우어슈타트까지는 썰매로, 그 다음은 마차를 탔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책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스크바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점만 빼고요.
◇ 라이프치히
이제 유럽은 나폴레옹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습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 불패(不敗)를 자랑하는 전쟁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주요국들은 6차 대불동맹으로 다시 뭉쳤습니다. 영국은 여전히 재정 지원을 담당했습니다. 스페인도 새로 가담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1813년 들어 5개월 만에 24만명의 병력을 모았습니다.
제국민전쟁으로 불리는 라이프치히 전투는 10월 15일 시작됐습니다. 프랑스의 총 병력은 19만명 정도였고, 연합군은 거의 33만명에 달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연합군의 전열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격전 끝에 궁지에 몰리게 됐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전혀 발휘되지 못했습니다. 18일 저녁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퇴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두번째 참패를 겪게 됐습니다.
연합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 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맹렬하게 방어전을 이끌었습니다. 1814년 1월 브리엔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쳤습니다. 2월에는 샹포베르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을 공격했습니다. 5일간 격전 끝에 적군을 모두 분산시켜버렸습니다. 이어 2월 18일에는 몽트로에서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큰 흐름은 뒤집지 못했습니다. 3월말 파리에서 15km 남쪽 쥐비지에 있던 나폴레옹은 파리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자 “비겁하게 항복이라니! 내가 4시간만 일찍 도착했어도 모두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결국 4월 6일 프랑스 황제에서 물러난다는 선언문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당시엔 패장에 대한 너그러움이 존재했나 봅니다. 동맹국은 나폴레옹을 엘바 섬의 영주로 임명한 뒤 프랑스 정부로부터 매년 200만 프랑의 연금을 받을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4월 12일 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목표가 없는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로 했습니다. 러시아 원정에서 후퇴할 때 외과의사 이반에게서 독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독약을 마셨습니다. 새벽 3시 그는 심한 구역질을 했습니다. 극도의 고통이 지나간 후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났습니다. 오전 11시쯤에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중얼거렸습니다. “내 침대에 누운 채 죽기도 힘드는구나. 삶과 전쟁 사이에 별 차이도 없는 마당에.”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신은 내가 침대에서 죽는 것보다 전쟁터에서 죽기를 더 바라므로 살아야겠다.” 하지만 이제 그에겐 단 한번 타오를 마지막 불꽃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옛날 바깥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3]나약한 평화주의 ‘뮌헨 회담’ (0) | 2022.04.12 |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2]악을 악으로 갚은 2차대전 (0) | 2022.03.29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9] 유토피아 (下) 벨러미가 쓴 ‘뒤를 돌아보면서’ (0) | 2022.02.08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8] 유토피아 [중] 베이컨 ‘뉴 아틀란티스’ (0) | 2022.02.08 |
5000년 전, 금 빨대로 맥주 4000㏄ 마셨다…고대인들의 놀라운 주량 (0) | 2022.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