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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 졸업한 권기옥

colorprom 2022. 4. 9. 13:51

[모던 경성] 조선 첫 女비행사 “폭탄 가득 싣고 日 폭격하려고 비행술 배웠다”

 

[뉴스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 졸업한 권기옥...남편은 이상화 시인 형 이상정 장군

 

입력 2022.04.09 06:00
 
중국에서 비행사로 활약할 당시의 권기옥.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다 상해로 망명한 권기옥은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 비행사의 길을 걸었다./조선일보DB

 

‘조선에 처음인 여류비행가 권기옥 양은

금년에 중국 운남(雲南)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방금 그 학교에서 비행기를 연습하는 중이다.

그의 고향은 평양이니 기질이 튼튼하고 담대하고 여성적 기분이 적으며

한번 정한 일은 기어이 하고야 마는 것은 그의 천성이라 할 수있다.’

(‘외국에 노는 신여성’ 권기옥양, 조선일보 1925년 5월21일)

 

조선의 첫 여성 비행사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스물넷 권기옥이 주인공이었다.

 

권기옥은 1923년12월 동포 청년 3명과 함께 운남 육군항공학교에 입교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운남 군벌 당계요(唐繼堯)의 협조를 얻어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상해 임정은 항공대 창설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1925년 2월 운남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졸업한 권기옥조선 여성 최초의 비행사가 됐다.

한때 조선 첫 여성비행사로 잘못 알려진 박경원(1901~1933)보다 2년 앞섰다.

 

여성비행사 권기옥은 1925년 당시 벌써 유명인사였다. 운남육군항공학교 졸업후 상해에서 비행훈련을 계속하던 권귀옥의 근황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5년5월27일자 기사

◇평양 숭의여학교서 3.1운동 참가, 군자금 모집나서

권기옥은 평양이 고향이었다.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권기옥은 만세시위를 하다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 연락원과 접촉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팔아 송금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독립유공자 공훈록) 이듬해 10월 그의 뒤를 밟던 형사의 추적을 피해 두 길이나 넘는 담을 뛰어넘어 그 길로 진남포로 달아나서 목선을 타고 상해로 탈출했다.

권기옥은 1921년 항주의 홍도여학교에 들어가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고 1923년 6월 졸업했다. 그리곤 여학교 시절이던 1917년 경성 용산비행장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인 미국인 스미스를 보면서 키웠던 비행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운남육군항공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시작부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비행사를 지망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터무니없는 이유로 비행술을 배우려 했다.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일본까지 가서 폭격을 할 생각이었다.’(‘공군의 날에 붙이는 공군의 할머니’, 조선일보 1965년10월3일)

신문은 ‘적수공권으로 뛰어들어간 여자의 몸으로써 한푼의 학자(學資)를 도와주는 사람없이 벌써 6년 동안이나 학업을 계속하는 그의 열성과 인내력은 과연 감탄치 않을 수없다’고 썼다. 권기옥이 당시 친구에게 쓴 편지가 그의 곤궁한 형편을 말해준다.

‘사랑하는 벗아, 나는 오늘 오십리 밖에 비행기를 연습하러 나갔다가 배가 고파서 돌아올 수가 없었다.비행기 타고 돌아올 수 없었고 걸어서 돌아올 수없었다. 누가 나의 이런 답답한 사정을 알아주랴? 체험하여 보지 못한 너로서는 연구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으리랴만은 성공을 기대하고 밟는 길이니 모든 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한다.’(‘외국에 노는 신여성’ 권기옥양)

◇'중국 혁명전선의 한국인 비행가’

당시 중국은 손문과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정부가 광동에서 출발, 각 지역을 분할지배하던 군벌들을 제압하는 ‘국민혁명’을 벌이던 중이었다. 권기옥은 1925년 가을 북경의 풍옥상(馮玉祥)군 항공대에 들어갔다. 일본 침략을 받던 중국군에서 비행술을 익히면서 일제와 맞서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이다(윤선자, ‘한국독립운동과 권기옥의 비상’20쪽,한국근현대사연구 2014년 여름호)

그의 활약은 1926년 신문에 또 소개됐다. ‘국민군 제1비행대에 고빙되어 활약’하다 그해 4월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는 보도였다.(’풍진 어지러운 중국 공중(空中)에 異彩찬연한 조선 여장부’, 조선일보 1926년5월21일) 같은 날 동아,시대일보,매일신보 등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권기옥은 1926년 10월 내몽고에서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하고,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상정은 저항시인 이상화의 맏형으로 오산학교 교사를 지내다 망명,풍옥상 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있었다.

권기옥은 이듬해 상해로 가서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속 비행사로 활약했다. 그 즈음 조선의 첫 비행사 안창남, 최용덕, 민성기 등이 중국군에 들어가 창공을 누비고 있었다. ‘중국혁명전선의 조선인 비행가’(중외일보 1927년8월28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비행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실제로 풍옥상군에서 그에게 비행을 가르쳐주던 조선인 서왈보가 1926년5월 비행사고로 숨졌다.안창남,박경원도 비행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하지만 권기옥은 비행시간 1300시간을 기록할 만큼 건재했다. 대단한 여걸이었다.

조선일보 1965년10월3일자 인터뷰. 권기옥은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일본까지 가서 폭격할 생각에 비행술을 배웠다"고 했다.

◇임시정부 대한애국부인회 재건

상해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비행사가 된 권기옥에 대해 일제는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운남항공학교 입학과 졸업, 상해 체류, 장개석 국민정부의 비행사 활동을 주시하면서 현지 공관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보고가 이어졌다.(‘사상휘보’4, 1935년9월) 1928년 5월 남경에서 일본 영사관에 체포돼 조선에 송환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중국 유력자의 도움으로 3주일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권기옥은 남편 이상정과 함께 1936년 하반기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났다. 권기옥의 13년 비행사 경력은 이렇게 끝났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권기옥은 이상정과 함께 장개석 정부 전시수도인 중경으로 근거를 옮겼다.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했고, 중국 공군에 몸담고 있던 최용덕(1898~1969·공군참모총장·국방차관)과 광복군 비행대 편성을 의논하기도 했다.

권기옥이 1965년 공군의 날에 맞춰 한 조선일보 10월 3일자 인터뷰 때 촬영한 사진. 그는 "폭탄 가득 싣고 일본 폭격하려고 비행술 배웠다"고 말할 만큼 항일정신 투철한 청년이었다. /조선일보 DB.

◇‘남몰래 준 할머니 장학금’

해방은 벼락같이 왔다.이상정은 1947년 10월 모친상 급보를 받고 먼저 귀국했는데, 한달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떴다. 권기옥은 1949년 귀국했다.1950년부터 5년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고, 정계에도 입문했다가 이내 발을 뺐다.이후 한국연감 발행인,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권기옥은 일흔여섯 나이에 다시 신문에 났다. 이번엔 미담기사였다. 1975년부터 장학기금 1000만원을 만들어 고교,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몰래 주고 있다는 보도였다.(’남몰래 준 ‘할머니 장학금’, 조선일보 1977년 2월11일) 권기옥은 당시 인터뷰에서 “‘나 대신 조국에 유익한 일을 해달라’는 남편의 간곡한 당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시 기사는 ‘추운 겨울에도 방에 불을 지피지 않으면서 푼푼이 저축, 1000만원이 모인 1975년 이 돈을 은행에 장학기금으로 예치했다’고 소개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권기옥은 1988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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