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친절함이 자취 감춘 세상에서 빛나는 보석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겠냐만 되도록 천천히 나이 들고 싶다.
해를 넘길 때마다 하나씩 더해지는 나이는 어쩔 수 없더라도 행동은 그렇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아가씨답게 굴려고 노력 중이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에 짧은 치마를 입은 아이에게 “얘, 춥지 않니?” 하고 묻거나,
다이어트 중이라며 음식을 마다하는 아이에게 “네가 살 뺄 데가 어딨어!” 하며 다그치고 싶지만,
오지랖 넓은 아줌마처럼 보일까 싶어 애써 말을 삼키는 요즘이다.
하지만 카페에 갈 때만큼은 이놈의 입방정을 막을 도리가 없다.
아니, 손님이 왔는데 인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아니, 마시고 갈 건데 왜 물어보지도 않고 일회용 컵에 주는 거야?
아니, 이게 얼마짜리 커피인데 맛이 이 모양이야? 사장 나오라고 해, 어!
물론 내 귀에만 들리게 마스크 속에서 구시렁대기는 하지만 말이다.
![](https://blog.kakaocdn.net/dn/bPtGo9/btrygYWwQ0x/k3ICdooSfo9PDZIDwm4Lh1/img.jpg)
얼마 전 동네 카페를 찾았을 때도 문을 밀고 들어가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아니, 인테리어가 왜 이렇게 촌스러워?
사방으로 너저분하게 나붙은 와이파이 비밀번호 하며
귀곡 산장에나 어울릴 법한 칙칙한 통나무 테이블이라니.
성에 차지 않는 카페에 단돈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가게를 나서려 했다.
그런 나를 붙잡은 건
안성기 버금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하고 건네는 점원의 인사였다.
마지못해 키오스크로 향한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따뜻한 카페라테’와 ‘매장’ 버튼을 순서대로 눌렀다.
결제를 마치고 자리로 가려는데 어느새 내 곁으로 성큼 다가온 그가 나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드시고 가시면 머그잔에 준비해 드릴까요?”
사회적 거리 두기를 파격적으로 어긴 그의 접근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주춤주춤하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떡였다.
다정한 목소리로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설거지의 귀찮음을 무릅쓰고 머그잔을 권하는,
낯선 이와 겁도 없이 눈을 맞추는 저 기특한 청년은 어느 별에서 온 외계인이란 말인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커피를 만드는 그를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옳거니 무릎을 쳤다.
그는 마스크를 쓰기 이전 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과거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다지도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손님을 응대할 리 없을 테니까.
요즘 사람 같지 않은 그가 나는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카페에 갈 때마다 묘한 불편함을 느낀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데면데면한 비대면 시대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사람의 온기에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친절함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삭막한 세상에서 그가 베푸는 호의가 보석처럼 빛난다.
“따뜻한 카페라테 드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눈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를 따라 나도 미소 지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화답했다.
쟁반에 머그잔을 받쳐 들고 자리로 조심조심 돌아오는데
어머나, 짙은 갈색 커피 위에 부드럽게 거품을 낸 우유로 하트를 그려 놓았다.
불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을 꾹 눌러 덮은 커피만 마시느라 한동안 구경한 적 없는 라테 아트였다.
아니, 나 좋아하는 거야 뭐야아!
연하의 남자에게 사랑 고백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대는 걸 보니
정말이지 나도 참 주책이다.
입술에 와 닿는 머그잔의 부드러운 감촉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따뜻한 카페라테를 한 모금 삼켰다. 그 위에 그려진 하트도 함께 마셨다.
그의 정성과 친절과 사랑이 몸속 가득 퍼졌다.
촌스러운 카페의 단골이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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