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이주연] 내가 나 되는 길 위에서

colorprom 2022. 3. 18. 14:04

[산모퉁이 돌고 나니] 내가 나 되는 길 위에서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
입력 2022.03.18 03:00
 
 

두툼한 편지 한 통이 왔다.

‘OOO 드림’! 참으로 반가웠다. 그 이름 수년 만이다.

깨끗한 글씨로 또박또박 몇 장이나 되었다.

 

그런데 한 자, 한 자, 한 문장, 한 문장이 이어져 가는데

마침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협박문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몇 월 며칠까지 1000만원 이상을 통장으로 보내지 않으면 법원과 언론에 고발하겠단다.

액수는 봐주는 것이란다!

 

순식간에 마음은 배반감! 분노로 불타오르다가 허망함으로 구멍이 났다.

2년간 신성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는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그와 함께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산마루 노숙인을 위한 예배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 후 사랑의 농장에서 회복의 기간을 보내며 지냈다.

어렵고 힘들어도 늘 웃으며 이겨내는 것을 보면서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공동체 들어가서 자립하도록 해보라 하였다.

농지 1만2000평을 무상 임대받아, 노숙인 자립 자활을 위하여 만든 공동체이다.

 

시작하던 때이니 형편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숙소 리모델링도 좋게 한다고 했다.

우리 집 싱크대보다는 나았다.

 

염소 98마리, 닭도 300마리 가까이 마련했다.

3000평 고추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다.

이때 의식주를 다 해결해 주고, 농사비 일체를 제공했다.

스스로 땀 흘려, 스스로 일어나도록 뒷받침한다고 한 것이다.

 

모두 고생이 심했다.

그래서 이익금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판매금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고추 판매금의 일부는 한 형제가 가지고 사라졌다.

염소는 10여 마리 판매한 것 외에 50여 마리가 사라졌다.

숙소는 어느 날 오후 전소되었다.

이 와중에 화재 조사받으러 갔다가,

예전에 벌금 900여만원 내지 않은 것이 드러나 수감된 이가 바로 이번 편지의 발신인이다.

 

그때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교우들이 수감된 그를 위해 기도하고, 내가 탄원서를 의정부 교도소장에게 전하고,

추운 겨울 수차례 면회 가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석 달 후, 한 교우가 벌금 400여만원을 대납하여 그가 출소할 수 있었다.

그날 온 교우가 기뻐하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당시의 장부를 꺼내 보았다.

편지를 보낸 이가 20여 차례 가불하여 간 일들과, 여전히 갚지 않은 수백만 원의 기록도 있었다.

고통은 남고 은혜는 지워지는 것인가?

 

나는 한동안 기도 끝에, 무슨 사정이 있으려니 하여, 그분을 오라 하였다.

그는 봉사자들과 상담을 하고는 내게 왔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목사님, 제가 귀신에 씌었지, 왜 목사님 같은 분에게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세를 해결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만 해결해 주시면 됩니다.”

조금 더 보태서 요청대로 응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한 달 생활비만 해결되면 된다고 한다.

나는 요구대로 응했다. 큰 것도 아니다. 곁에선 내게 말렸다.

“목사님, 그렇게 계속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있다.

인간은 믿어주는 만큼 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주의 큰 사랑을 느끼기 전까지는 회개하지 못한다.

극기도 어렵다.

못 배운 이도 배운 이도, 아니 신학자도 목사라도, 가진 이도 못 가진 이도, 정치 지도자도 그러하다.

인간에게 무슨 다른 대책이 있는가?

 

또한 주께서는 그를 통해 나를 시험하신 것이다!

내 안에 일었던 분노와 좌절은 무엇인가? 부끄러운 일이다.

주께서는 내가 얼마나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

제대로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보게 하신 것이다.

이로써 주께서는 나를 나 되게 하시는 중이시리라!

 

다른 분이 쓴 편지 한 통이 또 왔다.

또박또박 마음을 다해 쓴 성경 필사(筆寫) 용지가 십자가 띠로 묶여 있었다.

“목사님, 담장 안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간 감사하였습니다.”

 

격주로 보내는 그분의 편지엔 늘 정성을 다해 쓴 성경 필사와 고백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분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늘 주께서 받을 것을 내가 받는다 생각했다.

 

그는 이윽고 3월엔 봄과 함께 세상으로 나간다고 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소망의 날이지만 두렵다고 했다.

나는 속달 등기를 보냈다.

 

“그간의 고난이 은혜가 되리라 믿습니다.

담장 안에서 더 높은 세계를 바라셨습니다.

나오시면 산마루공동체에서 우선 머무실 수 있습니다.

연락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아직 연락이 없다. 담장 안 빈자리로 소식이 전해졌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