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폐일소 외치다 구폐가 된 권력자들, 中 문화혁명 10년의 교훈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19회>
정권 말기 권력자의 분노는 파멸 예고하는 불길한 조짐
동아시아 전통에서 정권 말기 권력자의 분노는 파멸을 예고하는 불길한 조짐이라 여겨졌다. 상(商)나라 최후의 독재자 주왕(紂王)은 목숨을 걸고 실정을 비판한 충신 비간(比干)에 격노했다. 주왕은 “듣건대 성인(聖人)의 심장엔 일곱 구멍이 있다더군!”이라 말하며 비간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들여다봤다. 얼마 후 상나라 주왕의 군대는 목야(牧野)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군대에 대패했다. 이에 주왕은 보옥(寶玉)의 의상을 입고 잔뜩 재화를 쌓아두었던 “4장 9척”(대략 15미터) 높이의 사치스러운 녹대(鹿臺)에 올라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마천(司馬遷)의 묘사에 따르면, 군대를 이끌고 주왕의 궁궐을 점령한 무왕은 잿더미 속에서 불탄 주왕의 시신을 찾아내서 “큰 검으로 그 목을 자른 후, 흰색 깃대 끝에 꼽아서 번쩍 들어올렸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유교를 되살려 “화해(和諧)의 철학,” “화합의 이론”으로 만들고 있지만, 이는 유교의 근본을 호도하는 얄팍한 해석일 뿐이다. 유가 경전 <<상서(尙書)>>는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 장쾌한 정치 혁명의 서사(敍事)를 담고 있다. 2200년의 세월 동안 중국에 들어섰던 수많은 조대(朝代)가 예외 없이 유교를 국교로 채택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어떤 권력이든 부패와 실정으로 민심을 잃는 순간 천명(天命)이 뒤바뀐다. 하늘은 새로운 사람을 구해서 낡은 권력을 무너뜨리는 정권교체의 대업(大業)을 위임한다. “천명미상(天命靡常, 천명은 영원하지 않다)”이라는 유교의 명제는 권력자를 감시하고, 견제하고, 타도하고, 징벌하고, 나아가 처형까지 할 수 있는 무섭도록 엄중한 역성(易姓) 혁명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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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폐 일소” 외치다 자신이 구폐의 늪에 빠진 권력자들
정권교체가 그 자체로 혁명일 수는 없다. 부패한 권력을 몰아내고 등장한 권력이 더 부패할 수도 있고, 독재 타도를 내걸고 집권한 세력이 더 심한 독재를 행할 수도 있다. 특히나 민심의 파도에 올라타서 쉽게 권력을 잡고선 천하를 거머쥔 듯 득의양양 들떠 날뛴 무리라면, 민심의 부메랑에 급소를 얻어맞고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구폐(舊弊) 일소(一掃)”를 외치다가 구폐의 늪으로 침몰한 권력자가 즐비하다. “숙폐(宿弊) 혁파”를 외치다가 숙폐의 원흉이 된 권력자도 허다하다. “나만 예외”라고 생각한다면, 아첨꾼에 둘러싸인 눈먼 권력자의 순진한 오판일 뿐이다.
그렇기에 <<상서(尙書)>>는 정권 교체의 과정보다 이후 펼쳐지는 혁명의 가시밭길을 더 곡진하게 보여준다.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혁명은 주왕을 물리친 후 요절한 무왕이 아니라 그를 이어서 7년의 섭정(攝政)으로 예제(禮制)를 확립한 주공(周公)의 통치를 통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주공의 예제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통치 시스템을 의미한다. 누가 권력을 잡든 주왕을 죽인 무왕처럼 행세하지 말고 주공처럼 묵묵히 지난한 정치개혁의 정도를 가라는 고대(古代) 성현(聖賢)의 당부이다. 21세기 현실 정치에 그대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통치의 윤리가 아닐까.
“마오의 유훈 지켜야 한다” 주창한 화궈펑의 몰락
정권을 잡은 권력자가 낡은 이념에 얽매어서 시대의 소명을 읽지 못하면, 어김없이 천명을 잃고 처참하게 몰락한다. 마오쩌둥 사후 중공중앙의 권력을 장악했던 화궈펑(華國鋒, 1921-2008)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4인방을 체포하고 문화혁명을 종식한 주역이지만, 그 이후 전개되는 역사의 방향을 거꾸로 읽어서 권좌에서 밀려난 구시대의 상징이었다.
1950-70년대 마오쩌둥이 추구했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가혹하고도 참담한 대실패로 끝이 났다. 역사에서 정권의 실패는 많은 경우 사상적 오류에 기인한다. 잘못된 생각, 그릇된 가치, 허황된 관념, 극단적 사유가 권력자의 정치적 실패를 몰고 온다. 마오쩌둥의 정책이 실패했다면 상식적으로 그 원인은 “마오쩌둥 사상”에 놓여 있다. 문제는 중국에서 “마오쩌둥 사상”은 일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다수 인민을 동원해서 구축한 견고한 이념의 철옹성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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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 중국의 많은 인민은 “하늘이 무너진 듯 울고 또 울었다”고 회상한다. 1949년 건국 이래 27년 간 마오쩌둥은 날마다 전국 모든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하던 절대 권력의 인격신이었다. 신을 잃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신적 방황은 격렬할 수밖에 없다.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추모대회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1976년 10월 5일, 마오쩌둥의 후계자 화궈펑은 군방부 장관 예젠잉(葉劍英, 1897-1986), 중공중앙위 판공청 주임 왕동싱(汪東興, 1916-2015)과 함께 비밀리에 3자 회담을 열었다. 이날 세 사람은 4인방을 전격적으로 체포하기로 결의했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 6일, “4인방 분쇄(粉碎)” 작전이 개시되었다. 바로 그날 4인방은 모두 체포되었다. 보름 쯤 지나서 베이징에서 150만 명의 군대와 인민이 함께 모여서 “4인방 분쇄”를 경축하는 대규모 군중대회가 거행되었다.
“4인방 분쇄”는 “문혁”의 끝을 알리는 중대한 사건이지만, 새 시대를 알리는 새로운 태양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화궈펑은 오로지 “마오쩌둥 사상”만을 굳게 견지한 채 무산계급 독재를 유지해야 한다고 선언할 뿐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오로지 빙의(憑依) 현상처럼 마오쩌둥의 망령이 깃들어 있었다.
화궈펑은 낡은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모순,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모순, 중국공산당과 4인방의 모순” 등등. 비단 화궈펑만이 아니었다. 운동 중의 육중한 물체처럼 인간의 뇌리에 박힌 교조적 이념도 관성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 시대 다수 인민은 여전히 마오쩌둥에 포박당한 마오쩌둥 사상의 수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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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2월 7일 중앙기관지 <<인민일보>>, <<해방군보>>, <<홍기>>는 일제히 화궈펑의 교시를 선전했다. 문혁의 시대를 마감하면서 화궈펑은 “마오주석의 모든 결정과 정책을 굳게 지켜야 한다! 마오주석의 모든 지시를 견결히 준수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 화궈펑이 외친 이 구호는 “양개범시(兩個凡是)로 통했다. “두 가지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였다. 마오쩌둥의 유훈 통치로 문혁 이후의 중국을 이끌고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곧 이어진 1977년 3월 3-16일의 전국 계획회의에서 화궈펑은 4인방 노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마오쩌둥 사상에 입각한 강력한 계획경제의 재건을 논의했다. 3월 24일 국방부 장관 예젠잉 역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이용하여 군대를 파괴한 4인방의 죄행을 비판하고 그 영향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과 4인방을 분리시켜 문혁 기간 발생했던 모든 잘못은 4인방에 떠넘기는 미봉책이었다.
1976년 5월까지 화궈펑은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라!”며 대규모 정치 캠페인을 벌이기에 바빴다. 이후 중공중앙의 평가에 의하면, 그 당시 화궈펑은 “무산계급 독재 하에서 계속적인 혁명을 추진”하는 “좌경(左傾)” 이론의 착오를 범하고 있었다. 물론 마오쩌둥의 유훈 통치는 오래갈 수 없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상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 기치 올린 덩샤오핑, 사상혁명의 신호탄
1977년 4월 10일 덩샤오핑은 중공중앙에 화궈펑의 “양개범시”를 비판하는 간곡한 서신을 보냈다. 1977년 7월 정계에 복귀할 때 덩샤오핑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전면에 내세웠다. 마오쩌둥 사상만을 고집하는 화궈펑을 향해 실사구시야 말로 마오쩌둥 사상의 요체라고 주장했다. 물론 마오쩌둥은 입으로만 실사구시를 강조했을 뿐, 그가 추진했던 모든 정책은 현실을 무시한 독단적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덩샤오핑은 “실사구시”라는 한 마디로 화궈펑의 교조주의를 제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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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봄, 덩샤오핑의 오른팔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은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부총장직에 임명되었다. 중앙당교는 공산당 고위 간부의 이념교육을 총괄하는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자유분방하고 관대한 성격의 후야오방은 마오쩌둥 통치 아래서 박해당하고 격리되었던 지식인들에게 다시금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는 날마다 당교의 연구원들과 함께 장래 중국에서 정치적 민주화와 사상적 자유화를 이루는 방안을 궁구했다.
후야오방 주변에 운집한 다양한 그룹은 대부분 마르크시즘의 원칙론을 견지하면서 마오쩌둥의 사상과 정책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전문지식을 폄훼하고 지식인을 박해했던 마오쩌둥 시대의 반(反)지성주의를 비판했다. 그들은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학문의 자율성을 강조했는데, 그들의 논의가 중앙 언론에 영향을 준 듯하다. 예컨대 1977년 3월 15일 <<인민일보>>의 사설에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자연과학을 대신할 수 없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당연한 말 같지만, 마오쩌둥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후야오방은 1977년 11월 다시 정부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공중앙 조직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직부 수장으로서 후야오방은 문혁 시대의 희생자들을 복권시키는 과감한 개혁을 주도했다. 화궈펑은 극렬히 반대했고, 덩샤오핑도 적당히 60% 정도만 복권시키자는 제안을 했지만, 후야오방은 고집스럽게 대규모의 복권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50-60년대 탄압당하고 억류되었던 거의 모든 희생자들이 복권되었다. 피해자들 중엔 전직 관리, 과학자, 지식인, 숙련노동자 등 다양한 부류가 섞여 있었다. 그 숫자는 300만명에 달했는데, 그중 많은 인원이 공직에 다시 임명되었다. 1978년 3월 18일, 덩샤오핑은 과학자, 기술자를 포함한 모든 지식인들에게서 부르주아의 낙인을 제거했고, 후야오방은 지주와 부농에 가슴에 새겨졌던 “반혁명분자”의 주홍글씨를 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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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증명...진정한 정권 교체는 사상 혁명으로 완성
덩샤오핑과 후야오방는 국공내전 당시부터 쓰촨과 윈난 지역에서 공동작전을 펼쳤던 정치적 선후배이자 이념적 동지였다. 덩샤오핑의 딸 덩롱(鄧榕, 1950- )이 쓴 전기에 따르면, 쓰촨 출신 덩샤오핑은 광둥에서 이주해 온 하카(客家)인의 후예였다. 후난성 출신의 후야오방도 하카(客家)인이었다. 하카 배경이 두 사람의 인연을 더 끈끈하게 묶는 매듭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다만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을 일심동체의 정치적·이념적 쌍생아로 본다면 큰 오산이다. 두 사람은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이 매우 달랐고, 정치적 입장에서도 적잖은 차이를 드러냈다.
기질적·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화궈펑을 축출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는 중공중앙 제2의 혁명에서 굳게 손을 잡았다. 덩샤오핑이 “실사구시”의 기치를 올린 후, 후야오방은 사상혁명의 수문을 열어젖혔다. 본격적인 사상투쟁이 개시되자 자연과학자들이 민주정신을 부르짖고, 철학자가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했다. 문예계에선 다양한 첨단의 기법으로 문혁 때의 극한 체험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상흔문학(傷痕文學)의 장르가 생겨났다. 봇물처럼 터진 지식인의 비판은 사상혁명의 강물이 되어 출렁이며 흘러갔다. 한 시대의 어둠이 걷히면서 서서히 새로운 태양이 솟아나고 있었다.
문혁 10년을 거치는 과정에서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은 과연 어떤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덩샤오핑은 문혁의 광란 속에서 동생이 자살을 하고, 아들이 불구가 되고, 온 집안이 짓찢기는 고통을 겪었다. 후야오방은 2년 반의 세월을 사설 감옥 “우붕(牛棚, 소우리)”에 갇힌 채 집단린치와 인신모독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험난한 과정을 겪고 나서야 두 사람이 얻은 깨달음은 다음 한 마디였다.
“실천이 진리 검증의 유일한 기준이다”
1978년 봄, 중앙당교의 이론가들이 바로 그 한 마디의 단순명료한 명제를 도출하기까지 거의 30년의 세월 중공중앙은 독단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야만 했다. 1978년 12월 중공중앙이 공식적으로 선언한 “개혁개방” 노선은 2년에 걸친 사상투쟁의 결실이었다. 대기근과 문혁의 참상을 거친 후에도 화궈펑은 마오쩌둥 사후 2년 동안 마오쩌둥 사상만 붙들고 있었다.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이 온몸으로 증명했듯, 진정한 정권교체는 사상혁명으로 완성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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