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바깥 세상

[영국] [23]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colorprom 2022. 1. 4. 13:24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23]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입력 2022.01.04 00:00
 
 

“1700년에 프랑스는 경제 규모에서 영국의 두 배, 인구 수로는 세 배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자신의 책 ‘제국’에서

18세기에 접어들 무렵, 프랑스와 영국은

객관적 국력(國力) 면에서 이 정도 격차가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퍼거슨이 언급한 당시 영국의 인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친 것으로 보입니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당시 프랑스 인구는 2100만명, 잉글랜드는 520만명이었습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인구가 약 100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앵글랜드스코틀랜드(1702~1714) 여왕 통치 때인 1707년 하나로 합쳐져

‘브레이트 브리튼 통합 왕국’을 출범시키게 됩니다.

 

명예혁명(1688)이 일어난 지 6개월 밖에 안된 1689년 5월,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바로 한 달 전 부인 메리 2세(1689~1694)와 함께 잉글랜드 공동 왕으로 대관식을 치른

오렌지 공 윌리엄 3세(1689~1702)가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전쟁(또는 9년 전쟁, 1688~1697)에 참전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전쟁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많은 유럽의 전쟁 중 하나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큰 의미가 있는 전쟁입니다.

의회 승인으로 왕좌에… 영국 윌리엄 3세 대관식
- 1689년 4월 11일 영국 상원(House of Lords)에서
잉글랜드의‘공동왕’으로 즉위하는 윌리엄 3세 왕과 메리 2세 여왕 대관식.
신교도였던 딸 메리와 달리 가톨릭 구교도였던 아버지 제임스 2세는
절대왕정과 보호주의 무역으로 영국을 위협하던 프랑스 가톨릭왕 루이 14세 편에 섰고,
영국 귀족들은 메리와 윌리엄 공의 군대를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민심을 잃은 제임스 2세는 결국 프랑스로 패주했다.
왕이 의회와 타협하며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를 연 ‘명예혁명’이었다.

 

네덜란드 후기 바로크 예술가 호메인 데 후게는 성대한 대관식을
새 왕과 여왕의 마차 행렬, 템스강 불꽃놀이 등 판화 9개 장면으로 기록했다.
중앙부 대관식 장면(부분), 네덜란드 왕립도서관 소장. /위키피디아
 

근대국가의 틀을 갖춰나가는 과정에서 잉글랜드

종교적 이유 또는 무역 이익을 위해 주변국과 마찰을 빚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상대가 프랑스인 경우도 있었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와도 전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17세기 후반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3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는데

이 충돌은 상업적인 동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장과 무역을 둘러싼 경쟁을 벌인 것이지요.

이런 전쟁은 대부분 일시적인 것이었고, 단기간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내일은 반대 상황이 되는 등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그런 충돌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예혁명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잉글랜드(영국)프랑스는 유럽을 넘어 전 세계 주도권을 놓고

세기의 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한 잉글랜드의 전쟁 선포는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 세기 이상이나 계속된

이른바 제2차 백년전쟁의 시작(영국의 역사, 하, 나종일·송규범)”이었던 것입니다.

 

퍼거슨은 이를 두고

“프랑스와 벌인 전쟁은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과연 누가 이기게 될까요.

 

◇ 프랑스를 막아라

 

모든 전쟁이 그렇듯

그 밑바닥에는 여러 동인(動因)과 복선이 복잡하게 깔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전쟁도 그랬습니다.

 

1688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전격적으로 팔츠 침공에 나섰습니다.

그가 내건 명분은 팔츠 선제후의 남자 혈통이 끊겼고,

자신의 동생의 아내, 즉 제수가 팔츠 선제후의 딸이므로

프랑스 왕가가 팔츠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나라의 이해 관계가 이리저리 얽혀있는 유럽 정치 지형에서

이런 주장은 강자가 완력으로 주변 약소국을 압박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레판토 해전도.
메시나를 출발한 신성동맹 해군은 오스만 튀르크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지중해 전체가 이슬람 세력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냈다.

 

사실 루이 14세의 머릿속엔 다른 셈법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초기엔 오스만투르크의 기세가 등등했지만

유럽 각국이 신성동맹을 결성해 반격에 나섰습니다.

궁지에 몰린 오스만투르크는 유럽국 중 유일한 동맹인 프랑스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주판알을 튕겼을 겁니다.

오스만이 완패해 발칸반도마저 라이벌인 합스부르크가(家) 손에 들어간다면

자신이 열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합스부르크와 오스만이 싸우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라인강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프랑스에게 다른 나라들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 스웨덴, 바이에른, 작센 등이 아우크스부르크동맹을 결성해

루이 14세에 맞섰습니다.

 

잉글랜드의 참전은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루이 14세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에게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고,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에 상륙해 왕위 탈환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여왕 입장에서 보면,

왕관을 쓴 지 한 달 밖에 안됐는데 왕권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묵과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 전쟁은 잉글랜드에게는 ‘왕위 계승 전쟁’의 성격을 갖게 됐습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반대편, 즉 아우크스부르크동맹에 합류하게 됩니다.

 

전쟁은 프랑스에게 별로 신통한 결과를 안겨주지 못했습니다.

 

바다에선 한때 비치헤드 해전(1690)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곧 노르망디 해안의 라오그 해전(1692)에서 프랑스 함대가 참패를 하게 됩니다.

대륙 전투에서도 초기엔 프랑스가 우세했지만,

1695년 연합군이 나무르 요새에서 루이 14세에게 참패를 안겨줬습니다.

 

결국, 양측은 1697년 라이스봐이크 조약을 체결하는데,

루이 14세는 1678년 이후 점령한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윌리엄 3세의 잉글랜드 왕위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 태양왕

 

루이 14세는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왕 중 한 명입니다.

역사는 그를 ‘태양왕’이라고 부릅니다.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

그가 한 말,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 되었지요.

 

볼테르는 그의 시대를 고대 그리스 황금기에 뒤지지 않는다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절대 권력의 상징인 프랑스 루이 14세.
하지만 엘리아스의 분석에 따르면,
루이 14세도 궁정 예법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던 개인에 불과했다.
 

선왕인 루이 13세 부부가 23년 만에 본 아들이기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의 선물’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만 다섯 살 밖에 안된 그는 아직 나라를 통치할 수 없었고,

국정은 재상인 마자랭이 맡았습니다.

두 차례 ‘프롱드 난’을 겪는 등 위기도 있었지만 결국 이겨낸 뒤

마자랭 사후 1661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루이 14세가 직접 국정을 관장하면서 프랑스의 국력은 승승장구를 거듭했습니다.

특히 그에겐 유능한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장 바티스트 콜베르 재무총감이었습니다.

콜베르는 프랑스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정치가인데,

무역과 산업을 장려해 국부를 증가시키고, 재정·세제 등을 개혁했습니다.

콜베르는 해군력 강화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661년 20척이던 해군 전함을 1690년 270척 이상으로 늘렸습니다.

그가 키운 프랑스 함대가

비치헤드 해전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함대를 격파한 것이지요.

 

콩데튀렌 등 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당대를 호령하는 인물들이었고,

보방은 공성술과 방어요새 건축으로 이름을 날린 군사공학자였습니다.

 

루이 14세튼튼한 재정과 막강한 군사력, 뛰어난 인재들을 자산으로 삼아

본격적인 영향력 확장에 나서게 됩니다.

그가 1715년 사망할 때까지 일으킨 대규모 전쟁만 네 차례에 달했습니다.

 

에스파냐 일부 영토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일으킨 권리 이전 전쟁(1667~1678),

네덜란드 전쟁(1672~1678), 아우쿠스부르크동맹 전쟁(1688~1697),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1701~1713) 등이었습니다.

 

루이 14세의 목표는 프랑스와 자신의 영광과 부귀,

라인강과 알프스 산맥 및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천연 국경선’까지의 영토 확장,

합스부르크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파괴 등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 내내 유럽은 루이 14세의 공격적 성향 때문에 속앓이를 했습니다.

그의 야욕을 꺾을 만한 힘이 다른 나라에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1700년을 전후해 루이 14세와 맞붙어보겠다고 하는 나라가 등장한 것이지요.

바로 잉글랜드였습니다.

 

사실, 잉글랜드

17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의 열강으로 대우를 받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청교도혁명 이후 왕정복고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1660~1685)는

1670년에 루이 14세와 ‘도버협약’이라는 비밀협약을 맺습니다.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전쟁을 할 때 잉글랜드가 병력 6000명을 지원해주고,

찰스 2세는 조만간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다는 내용과 함께,

찰스 2세가 루이 14세로부터 매년 23만 파운드의 현금을 받는다는 내용도 들어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서 지원금을 받는 처지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명예혁명을 거쳐 오렌지 공 윌리엄 3세를 통해 네덜란드와 한 나라가 된 잉글랜드

무시못할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나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프랑스에게 도전장을 던질 정도로요.

 

◇ 돈, 돈, 돈

 

15세기 말엽 이탈리아 원정으로 유럽을 깜짝 놀라게 만든 샤를 8세에 이어

프랑스 왕이 된 루이 12세

1499년 밀라노 침공을 감행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그의 보좌관 답변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첫째도 돈이요, 둘째도 돈이요, 셋째도 돈입니다.”

 

이 말은 인류가 지금까지 치른 전쟁을 고찰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고,

첨단(그 시대 기준으로 볼때) 무기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로는

특히 그러하다고 봅니다.

 

군비를 누가 얼마나 많이 효율적으로 마련하느냐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정권과 왕조의 흥망을 결정짓는 요소로도 작용을 하게 됩니다.

 

제가 매주 보내드리고 있는 뉴스레터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 문제의식은 바로 “영국은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는가”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인구 측면에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프랑스를 넘어선 적이 없습니다.

국토의 면적도 작습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주요한 전쟁에서 영국은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던 것일까요.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몇 가지의 이유와 원인, 배경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재정입니다.

전쟁과 연결시킨다면 군비(軍費) 또는 전비(戰費)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국의 역사(하)’에 따르면 스튜어트 왕조 후반기인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통치기 때 평소 정부 지출은 연간 약 200만 파운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 때엔 정부 지출이 급증하게 됩니다. 윌리엄 3세 시대가 되면 전비 지출 등으로 이 액수가 600만 파운드에 달하게 됩니다. 18세기에 접어들면 잉글랜드의 1년 정부 지출은 900만 파운드까지 치솟게 되고 이후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사정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콜베르 사후 루이 14세는 심각한 재정 악화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막대한 전비 지출 때문이었습니다.

핵심은 이 재정이라는 면에 있어서 잉글랜드(영국)가 프랑스를 압도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1세기 후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해 대영제국을 세우는 갈림길도 여기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오렌지 공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 왕에 오르면서 양국은 ‘한 지붕 두 나라’ 즉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 묶이게 됩니다. 이후 런던에는 네덜란드로부터 사람과 돈이 몰려들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금융과 재정은 당시엔 선진국이었던 네덜란드로부터 많은 전문 인력과 노하우,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공채(公債)와 중앙은행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영란은행 본부 건물.

잉글랜드 의회는 1693년 공채 발행을 승인했습니다. 이 공채는 정부가 차입한 원금을 돌려주지 않지만 평생 일정액의 이자를 지급하는 ‘영구 공채’였습니다. 이자는 정부가 국민에게 걷는 물품세를 재원으로 삼아 지급했습니다. 의회가 법률로 100% 확실하게 이자 지급을 보증하는 채권은 당연히 투자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인 1694년에는 영란은행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비치헤드 해전에서 프랑스에게 대패한 뒤 강력한 해군 육성에 대한 요구가 높았습니다. 정부는 큰 돈이 필요했는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윌리엄 3세 정부가 추진한 것이 영란은행 설립이었습니다. 영국 최초의 주식회사 은행인 영란은행은 주식을 발행해 마련한 자본금 120만 파운드 전액을 정부에 빌려주고, 연 8%의 이자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돈 중 절반이 잉글랜드 해군 육성에 사용됐구요.

◇영구 공채

재미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근대국가의 재정혁명 II(윤은주)’라는 논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788년 영국 정부의 차입금은 국내총생산(GNP)의 181.8%에 달했지만, 프랑스는 55%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세수입에서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영국이 56.1%, 프랑스는 61.9% 였습니다. 즉, 당시 영국 정부가 프랑스 보다 3배 이상 많은 부채를 지고 있는데도, 부채를 갚는 데 사용하는 돈의 비중은 프랑스가 더 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비결은 어떤 채권을 발행했느냐에 있습니다. 1720년 이후 영국에서는 영구 공채가 전체 정부 자금 조달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전체 원리금 변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85%에 달했습니다. 이 채권은 이자율이 낮았습니다. 1717년에 이미 5%까지 떨어졌고, 1730년대엔 3%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전쟁 때 급하게 발행했던 단기 채권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영구 공채으로 전환됐습니다. 예를 들어 1763년 367만 파운드에 달하는 전쟁 채권이 모두 이자 4%의 영구 공채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전쟁을 하는 상대방에겐 엄청난 부담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정치가인 네케르는 이를 두고 “영국은 지금도 여전히 3억 파운드를 더 빌릴 여력이 있다. 그것도 3%의 연 이자로 말이다. 영국의 부와 인구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능력과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리의 채권 발행이 가능했던 것은 채권을 갚을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인데요.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관세와 물품세 등 간접세를 중심으로 세수 확대를 이끌었습니다. 간접세는 세금을 올리기도 쉽고, 저항도 적었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직접세에 치중했는데, 세금을 걷기도 쉽지 않았고 저항도 많았으며, 결국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채권을 발행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는 직접세가 전체 세입의 절반 정도에 달했고, 이는 영국의 2배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발행한 채권도 이자가 높은 경우가 많아 이를 갚는데 큰 고통이 따랐고, 결국 프랑스 정부는 3번이나 파산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영국(잉글랜드)는 인구도 적고, 땅도 작았지만 경쟁자인 프랑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동원할 수 있었고, 전쟁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재정 혁명을 달성함으로써 영국은 군사 대국이 됐고, 대영제국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제군주정이었던 프랑스와 달리 영국이 입헌군주였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