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22] 누구도 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 그가 비록 왕일지라도.
“크리스마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들에게는 견디기 힘들 수 있습니다.
특히 올해 저는 그 이유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Christmas can be hard for those who have lost loved ones.
This year especially I understand why.)”
◇ “나의 사랑하는 필립”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런던 서쪽 교외 템스강변에 있는 윈저성에서 촬영된 총 9분짜리 이 동영상에는
코로나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국민들에 대한 위로와 미래에 대한 희망,
지난 4월 사별한 남편 필립공을 향한 여왕의 그리움과 애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oIktw/btro8w11EdW/gccNByUSBKWUivjnU7KkEK/img.jpg)
여왕은 남편을 ‘사랑하는 필립’이라고 부르며
“마지막 순간의 그 장난기 어리고 호기심 가득찬 반짝이는 눈빛은
내가 그에게 처음 눈길을 줬던 그때 그대로였다”면서
“하지만 인생이란 처음 만남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헤어짐도 있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나와 가족이 그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도 우리가 행복한 성탄전을 보내기를 바랄 것”
이라고 했습니다.
동영상에 등장한 여왕은 빨간색 옷을 입고 진주목걸이를 했는데,
BBC는 특히 오른쪽 가슴에 찬 국화꽃 모양의 사파이어 브로치에 주목했습니다.
이 브로치는 1947년 여왕이 필립공과 신혼여행을 갔을 때 착용했던 그 브로치라고 합니다.
또, 여왕은 이날 책상에 앉아 성탄절 메시지를 읽었는데,
그 책상 위에 지난 2007년 여왕과 필립공의 결혼 60주년 회혼식 때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진 속 여왕도 이 사파이어 브로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왕에게 올해 성탄절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우선 남편 필립공이 곁에 없었고,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약 50여명이 참석하는 왕실 가족 식사를 취소했습니다.
또, 작년에 이어 올해도 샌드링엄 왕령지에 가지 못했습니다.
노퍽주에 있는 이 왕령지는 런던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약 15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BBC에 따르면 여왕은 코로나가 터지기 이전, 즉 2019년까지 32년 동안
성탄절을 샌드링엄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은 여왕이 샌드링엄에 있는 성당에 가는 모습을 보고,
여왕의 메시지를 들으며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샌드링엄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여왕을 보려고
전국에서 수 천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올해 이런 장면은 볼 수 없었습니다.
영국인들에게 ‘정상적인’ 성탄절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지요.
![](https://blog.kakaocdn.net/dn/c8UXyc/btroZEfVZlw/fTRRuSsl3IdC4EbnL7s7m1/img.jpg)
여왕의 성탄절 메시지와 관련, 또 하나 눈에 띈 것은
니콜라스 위첼이라는 BBC 왕실 출입기자의 분석 기사였습니다.
그는
“여왕의 메시지가 다음 세대에 ‘바통을 넘기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95세의 여왕이 자신의 건강 문제가 불거진 해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여왕이 성탄절 메시지에서 왕위 계승과 관련,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 필립공이 언제나 다음 세대를 생각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필립공이 1956년 국제적 청소년 자기성장 프로그램인
‘듀크오브에든버러 어워드(The Duke of Edinburgh’s Award)’를 설립했다고 말했습니다.
필립공이 살았을 때 했던 업적을 기린 것입니다.
그런데. 왕실 출입기자는 ‘바통 물려주기(passing the baton)’란 말에 주목해
마치 여왕이 내년에 특별한 이벤트가 만들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 것입니다.
1926년에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에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내년은 왕이 된지 만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 長壽 국왕, 短命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록은 말 그대로 신기록 그 자체입니다.
과거 어떤 왕도 이만큼 긴 길을 걸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 왕좌에 앉게 될 어떤 후손도 이에 필적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 왕을 하려면 본인의 능력과 자질, 품성은 물론 천운(天運)이 따라야 합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고, 큰 병 없이 오래 살아야 합니다.
국내적으로 반란이나 역모를 차단 또는 진압해야 하고,
국외적으로 외세 침입을 막고 외국과의 전쟁을 이겨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내년에 맞게 될 재위 만 70년은
5세기 중엽 앵글로색슨이 잉글랜드에 들어온 이후 처음 있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일입니다.
그를 이어 장수 국왕 2위는 대영제국 절정기를 누렸던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간 왕좌에 있었습니다.
3위는 조지 3세(1760~1820)로 60년, 4위는 헨리 3세(1216~1272) 56년,
5위는 에드워드 3세(1327~1377) 50년입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45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반면, 단명했던 국왕들도 있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1066~1087) 이후
자연사나 병사, 전사 등이 아닌 이유로 왕좌에서 쫓겨나거나 물러난 사람은
모두 8명입니다.
기준을 윌리엄으로 한 건 그 이전과 이후의 잉글랜드(영국)가
크게 달라진 모습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선 왕권이 대단히 굳건해집니다.
그리고 알프레드 대왕으로 대표되는 웨식스 왕가의 혈통이 완전히 끊어지고,
윌리엄의 혈통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후 지금까지 모든 왕은 부계(父系)나 모계(母系) 쪽으로 어떻게든
윌리엄과 연결된다는 뜻이지요.
왕좌에서 쫓겨난 왕들 중 재위 기간이 5년이 채 되지 않는 경우는 단 4명입니다.
에드워드 5세(2개월), 에드워드 8세(11개월), 리처드 3세(2년 2개월), 제임스 2세(3년 10개월)
등입니다.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3세는 장미전쟁(1455~1485) 때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왕권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싸우던 때
잠시 왕이 됐던 인물들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Apo2r/btro6aE8r61/DGAQLKoJstfaYdpihkswtK/img.jpg)
백년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왕국을 안정시킨 에드워드 4세(1461~1483)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에드워드 5세(1483)는 만 13세가 안된 소년이었습니다.
이 꼬마 왕에게 최대 위협은 선왕의 동생, 즉 작은 삼촌인 글로스터 경 리처드였습니다.
선왕은 동생 리처드를 왕과 왕국의 보호자로 지명하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를 빌미로 런던에 입성한 리처드는 조카 주변에 있는 유력자들을 모두 제거한 뒤
결국 스스로 왕좌에 올라 리처드 3세(1483~1485)가 됐습니다.
리처드는 그해 7월 대관식을 가졌는데,
그 다음 달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요크의 리처드는 런던탑에서 질식사했다고 합니다.
암살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재밌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 즉 조선에도
‘데칼코마니’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
2년 후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의 7대 왕 세조입니다.
리처드 3세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튜더 왕조의 시조(始祖) 헨리 튜더가
1485년 8월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했습니다.
전투는 초반부터 헨리 튜더쪽으로 기울었지만
리처드 3세는 도망가지 않고 왕관을 쓴 채 끝까지 싸우다 쓰러졌다고 합니다.
이후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대관하게 됩니다.
단명 순위 둘째에 오른 에드워드 8세(1936)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걷어찬 인물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안된 상황에서 2번째 이혼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미국인 심프슨과의 결혼을 국민들이 반대하자 아예 국왕 자리를 버렸습니다.
어쨌든 그 덕에 동생인 조지 6세가 왕 자리에 올랐고,
조지 6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2세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재위 기간이 넷째로 짧은 제임스 2세(1685~1688)는
영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좋은 뜻이 아니라 나쁜 뜻에서입니다.
그는 국민과의 계약을 어기고, 법에 의한 지배를 거부해 혁명을 초래한 장본인입니다.
청교도혁명 때 참수를 당한 아버지 찰스 1세(1625~1649)와 함께
국민(의회)에 의해 쫓겨난 두 명의 왕 중 한 명입니다.
영국의 근대 이후 의회민주주의는
이 두 사람의 통치를 극복하면서 성취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 법의 지배를 거부한 왕의 패배
사실 제임스 2세는 어느 왕 부럽지 않게 좋은 조건에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나라 곳간은 넉넉했고,
2만명에 가까운 상비군을 두고 있어 안위에 대한 걱정도 없었습니다.
왕에 대한 국민들의 충성심은 높았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의회는 약하고 순종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가 법치를 무시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심사율과 관용령이 계속 충돌을 했습니다.
제임스 2세의 형이자 직전 왕인 찰스 2세(1660~1685)는
1672년 가톨릭 교도에게 좀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령을 공포했습니다.
하지만 의회는
이를 법의 지배에 대한, 그리고 의회의 입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무산시킨 뒤
한 발 더 나아가 가톨릭이 공직을 가질 수 없도록 규정한 심사율을 제정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2Jwi7/btro6aE8r9H/QEyDLhU6HskbuWSkVMWG71/img.jpg)
형에 이어 왕권을 잡은 제임스 2세는 심사율 폐지를 의회에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의회는 거절했고, 왕은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왕은 이어 궁정과 군대, 국교회 주교, 각 지방 주요 직위에 가톨릭 교도를 대거 앉혔습니다.
그러면서 심사율 효력을 정지시키고, 새 관용령을 선포했습니다.
제임스 2세의 행위는 ‘법에 의한 지배’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또 군대를 런던 근교에 주둔시켜 의회 세력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688년 터진 두 개의 ‘사건’이 급속히 위기로 발전했습니다.
왕비의 왕자 출산과 일곱 주교들의 항거였습니다.
지난 열두번째 편지 때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제임스 2세의 두번째 왕비 모데나가 결혼 15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제임스 2세는 첫째 왕비와 사이에 8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6명이 숨지고 딸 2명 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중 큰 딸이 오렌지공 윌리엄과 결혼한 뒤,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메리 2세(1689~1694)이고,
작은 딸은 언니의 뒤를 이어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왕이 된
앤(1702~1714) 여왕입니다.
어쨌든 왕자의 탄생은 잉글랜드를 통째로 뒤흔들었습니다.
잉글랜드 국민과 의회는 제임스 2세가 물러나면
개신교도인 큰 딸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꾹 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현재 왕에 이어,
역시 가톨릭 신자인 왕비 영향을 받고 자랄 왕자가
또 다시 잉글랜드를 가톨릭의 나라로 만들려 한다면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캔터베리 대주교와 6명의 주교 등 일곱명이
국왕의 가톨릭 정책에 반발한 것인데, 왕은 이들을 런던탑에 가뒀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이들 7인의 주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이들이 석방되는 날 국민들은 불을 밝히고 총을 쏘고, 종을 울리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정세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잉글랜드 의회의 종교 지도자들이
오렌지공 윌리엄에게 영국으로 와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우리가 익히 아는 명예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임스 2세는 딸과 사위의 군대에 맞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 존 로크
새로 소집된 의회는 1689년 초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하고,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s)과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잇따라 승인받았습니다.
권리장전은 권리선언에 다음 왕위 계승 순서 등을 추가해 법률로 만든 것입니다.
권리장전은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12가지로 열거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통치에 관한 기본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권이 의회의 동의없이 법 집행을 유보하거나 면제하는 것은 불법이다.
▶의회 허락없이 세금을 걷는 것은 불법이다.
▶왕에게 탄원하는 것은 신민의 권리이며, 탄원을 이유로 기소하는 것은 불법이다.
▶의회 동의없이 평시에 상비군을 유지하는것은 법에 위배된다.
▶의원을 뽑는 선거는 자유로워야 한다.
▶유죄 판결 이전에 벌금이나 몰수를 약속하는 것은 불법이고 무효이다.
의회는 제임스 2세가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국민과의 가장 기본적인 계약을 파기했고,
나라를 탈출해 왕위를 버렸다고 규정했습니다.
또한 국왕이라도 국가의 기본법을 침해·파괴할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현실 정치 세계의 변화와 발전은 철학과 정치사상의 발전과 손발을 맞췄습니다.
존 로크 등 위대한 철학자가 등장해 세상의 변화에 대한 해석과 정당성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사실상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로크는
명예혁명을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국의 경험주의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거쳐 로크에 이르러 체계화되었고,
정치철학쪽으로 로크는 토머스 홉스와 함께 사회계약설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명예혁명과 거의 때를 같이 해 ‘통치론(1690)’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런 저술을 통해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이 자연법적 기본권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 그쳐야 하며,
만약 정부(또는 왕)이 그 범위를 벗어나 권력을 휘두른다면
국민은 이에 저항하고 위임했던 권한을 회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제임스 2세의 통치와 명예혁명을 생각한다면,
결론은 하나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누구도 법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비록 왕일지라도.”
'옛날 바깥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7] 유토피아 (상) (0) | 2022.01.04 |
---|---|
[영국] [23]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0) | 2022.01.04 |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21]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政敵, 여왕은 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0) | 2021.12.22 |
아테네의 '종전' (0) | 2021.12.22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6] ‘신성한 가난’에서 ‘깨끗한 부’로 (0) | 2021.12.21 |